Literature(문학) 449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 / 이해인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 / 이해인 내가 심은 꽃씨가 처음으로 꽃을 피우던 날의 그 고운 설레임으로 며칠을 앓고 난 후 창문을 열고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의 그 눈부신 감동으로 비온 뒤의 햇빛 속에 나무들이 들려주는 그 깨끗한 목소리로 별것 아닌 일로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던 친구와 오랜만에 화해한 후의 그 티없는 웃음으로 나는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못 견디게 힘든 때에도 다시 기뻐하고 다시 시작하여 끝내는 꽃씨를 닮은 마침표 찍힌 한 통의 아름다운 편지로 매일을 살고 싶다

꽃씨를 선물하는 마음 / 이해인

꽃씨를 선물하는 마음 / 이해인 생일을 맞는 이에게 주려고 오늘은 분꽃씨를 따서 고운 봉지에 담아두었다. 우리가 서로 꽃씨를 선물로 주고받고 꽃이 피고 나면 그 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음은 얼마나 아름답고 기쁜 일인지! 지난 봄 선물로 받아 뿌린 나팔꽃씨에서 꽃잎이 비로드처럼 부드러운 붉은 꽃, 보라색 꽃이 끊임없이 피어올라 날마다 새로운 아침을 열고 있다.

꽃이름 외우듯이 / 이해인

꽃이름 외우듯이 / 이해인 우리 산 우리 들에 피는 꽃 꽃이름 알아가는 기쁨으로 새해, 새날을 시작하자 회리바람꽃, 초롱꽃, 돌꽃, 벌깨덩굴꽃 큰바늘꽃, 구름채꽃, 바위솔, 모싯대 족두리풀, 오이풀, 까치수염, 솔나리 외우다 보면 웃음으로 꽃물이 드는 정든 모국어 꽃이름 외우듯이 새봄을 시작하자 꽃이름 외우듯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즐거움으로 우리의 첫 만남을 시작하자 우리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먼데서도 날아오는 꽃향기처럼 봄바람 타고 어디든지 희망을 실어나르는 향기가 되자

꿈길에서 1 / 이해인

꿈길에서 1 / 이해인 살아 있는 동안은 매일 밤 꿈을 꾸며 조금씩 키가 크고 마음도 넓어지네 꿈에 가보는 그 많은 길들과 약속 없이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낯설고 낯익은 꿈속의 현실이 소리 없이 가르쳐준 삶의 이야기들 한 번 꾸고 사라질 꿈도 삶을 빛내느니 세상 어디에도 버릴 것은 없어라 살아 있어 꿈을 꾸고 꿈이 있어 행복하다고 나는 말하리

꿈길에서 2 / 이해인

꿈길에서 2 / 이해인 나는 늘 꿈에도 길을 가지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멀고도 좁은 길을 낯익은 사람 낯선 사람 꿈속에선 모두 가까운 동행인이 되지 꿈속의 길이라고 더 새롭지도 않은 나의 평범한 길을 열심히 걷다 보면 깨어나서도 내내 기쁨으로 흘러가는 나의 시간들 마음도 걸음도 흩어지지 않으려고 꿈에도 연습을 많이 했지 나를 길들이며 누구에게나 떳떳하고 아름다운 이웃으로 문을 열고 싶었지

꿈을 위한 변명 / 이해인

꿈을 위한 변명 / 이해인 아직 살아 있기에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꿈꾸지 말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꿈이 많은 사람은 정신이 산만하고 삶이 맑지 못한 때문이라고 단정 짓지 마세요 나는 매일 꿈을 꿉니다 슬퍼도 기뻐도 아름다운 꿈 꿈은 그대로 삶이 됩니다 오늘의 이야기도 내일의 이야기도 꿈길에 그려질 때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꿈이 없는 삶 삶이 없는 꿈은 얼마나 지루할까요 죽으면 꿈이 멎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꿈을 꾸고 싶습니다 꿈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꿈일기 1 / 이해인

꿈일기 1 / 이해인 나는 가끔 꿈길에서 어린 소녀가 된다 낯설면서도 낯익은 또 하나의 나를 본다 엄마가 지어준 노란 원피스를 입고 나비처럼 춤을 추거나 엄마가 수 놓아준 푸른 헝겊 가방에 책과 공책을 잔뜩 넣고 학교 길을 걸으며 지각할까 마음 조이는 콩새 가슴의 학생이 된다 얘, 넌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내게 묻는 나무들에게 아직은 몰라, 천천히 생각해야 돼 새침을 떨며 조용히 걸어가는 나 아직 어른으로 깨어나지 못하고 꿈속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어린 날의 추억과 뒹구는 작은 인형이 된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