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erature(문학)/Poem(시) 444

길 위에서 / 이해인

길 위에서 / 이해인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없어서는 아니 될 하나의 길이 된다 내게 잠시 환한 불 밝혀주는 사랑의 말들도 다른 이를 통해 내 안에 들어와 고드름으로 얼어붙는 슬픔도 일을 하다 겪게 되는 사소한 갈등과 고민 설명할 수 없는 오해도 살아갈수록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나 자신에 대해 무력함도 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오늘도 몇 번이고 고개 끄덕이면서 빛을 그리워하는 나 어두울수록 눈물날수록 나는 더 걸음을 빨리 한다

길을 떠날 때 / 이해인

길을 떠날 때 / 이해인 길을 떠날 때면 처음으로 빛을 보는 나비가 된다. 바람따라 떠다니는 한숨 같은 민들레씨, 내일 향한 소리없는 사라짐을 본다. 여행길에 오르면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기쁨을 수없이 감사하고, 서서히 죽어 가는 슬픔을 또한 감사한다. 산, 나무, 강에게 손을 흔들며 나는 들꽃처럼 숨어 피는 이웃을 생각한다. 숨어서도 향기로운 착한 이웃들에게 다정한 목례를 보낸다.

깨어 사는 고독 / 이해인

깨어 사는 고독 / 이해인 외출했다 돌아온 나의 빈 방에, 흰 무명옷을 빨아입은 정갈한 모습. 말없이 날 기다려 준 고운 눈매의 너. 손짓하지 않아도 밤낮 내 방을 지키며 깨어 사는 손님인가. 천장에도, 벽에도, 문에도 숨어 있다 가슴으로 파고드네. 죽고나면 또 어느 누가 이 나무침대 위에 쉬게 될까. 지금은 내가 이 자리에 누워 너를 만난다. 들을수록 정다운 카랑카랑한 목소리 뽑아 네가 노래를 하면 나의 방은 신기한 바닷속 궁전이 된다. 지느러미 하늘대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나는 짜디짠 밤의 물을 마신다

꽃마음 별마음 / 이해인

꽃마음 별마음 / 이해인 오래오래 꽃을 바라보면 꽃마음이 됩니다 소리없이 피어나 먼데까지 향기를 날리는 한 송이의 꽃처럼 나도 만나는 이들에게 기쁨의 향기 전하는 꽃마음 고운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싶습니다 오래오래 별을 올려다보면 별마음이 됩니다 하늘 높이 떠서도 뽐내지 않고 소리없이 빛을 뿜어 내는 한 점 별처럼 나도 누구에게나 빛을 건네 주는 별마음 밝은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싶습니다

꽃멀미 / 이해인

서울식물원에서 꽃멀미 / 이해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 꽃들을 너무 많이 대하면 향기에 취해서 멀미가 나지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 너무 많아도 싫지 않은 꽃을 보면서 나는 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지 사람들에게도 꽃처럼 향기가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지

꽃밭에 서면 / 이해인

꽃밭에 서면 / 이해인 꽃밭에 서면 큰 소리로 꽈리를 불고 싶다 피리를 불듯이 순결한 마음으로 꽈리 속의 자디잔 씨알처럼 내 가슴에 가득 찬 근심 걱정 후련히 쏟아 내며 꽈리를 불고 싶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동그란 마음으로 꽃밭에 서면 저녁노을 바라보며 지는 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고 싶다 남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받고 싶다 꽃들의 죄없는 웃음소리 붉게 타오르는 꽃밭에 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