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erature(문학)/Poem(시) 444

나의 꿈 속엔 / 이해인

나의 꿈 속엔 / 이해인 꿈 속에서 그려 보는 나의 그림 속엔 하나도 슬픈 얼굴이 없다 세월이 가면 자꾸 가면 할 수 없이 사람은 늙는다지만 우리 엄마 얼굴은 언제나 젊어 있고 북녘 멀리 떠나신 아빠도 이내 돌아오시고 나는 참 기뻐서 웃기만 한다 꿈 속에서 그려 본 나의 그림 속엔 한 번도 어둔 빛깔이 없다 어른들이 멋없이 괴로워하는 세상 세상이 어둡다면 빨갛게 파랗게 물들여 놓을까 나의 꿈 속엔 나의 하늘엔 오늘도 즐거워라 무지개 선다

낙엽 / 이해인

낙엽 / 이해인 낙엽은 나에게 살아 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 깨우쳐준다. 낙엽은 나에게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이승의 큰 가지 끝에서 내가 한 장 낙엽으로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일까 헤아려 보게 한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내 사랑의 나무에서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좀더 의식하고 살아야겠다.

낡은 구두 / 이해인

낡은 구두 / 이해인 내가 걸어다닌 수많은 장소를 그는 알고 있겠지 내가 만나 본 수많은 이들의 모습도 아마 기억하고 있겠지 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 보던 그는 내가 쓴 시간의 증인 비스듬히 닳아 버린 뒤축처럼 고르지 못해 부끄럽던 나의 날들도 그는 알고 있겠지 언제나 편안하고 참을성 많던 한 켤레의 낡은 구두 이제는 더 신을 수 없게 되었어도 선뜻 내다 버릴 수가 없다 몇 년 동안 나와 함께 다니며 슬픔에도 기쁨에도 정들었던 친구 묵묵히 나의 삶을 받쳐 준 고마운 그를

낯설어진 세상에서 / 이해인

낯설어진 세상에서 / 이해인 참 이상도 하지 사랑하는 이를 저 세상으로 눈물 속에 떠나 보내고 다시 돌아와 마주하는 이 세상의 시간들 이미 알았던 사람들 이리도 서먹하게 여겨지다니 태연하기 그지없는 일상적인 대화와 웃음소리 당연한 일인데도 자꾸 낯설고 야속하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토록 낯설어진 세상에서 누구를 의지할까 어차피 우리는 서로를 잊으면서 산다지만 다른 이들의 슬픔에 깊이 귀기울일 줄 모르는 오늘의 무심함을 조금은 원망하면서 서운하게 쓸쓸하게 달을 바라보다가 달빛 속에 잠이 드네

내 마음을 흔들던 날 / 이해인

내 마음을 흔들던 날 / 이해인 바람 부는 소리가 하루 종일 내 마음을 흔들던날. 코스모스와 국화가 없으면 가을은 얼마나 쓸쓸할까. 이 가을에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길들여야지.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한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에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실수나 잘못을,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세심하게 읽어낼 수 있는 지혜를 지녀야겠다.

내 마음의 방 / 이해인

내 마음의 방 / 아해인 혼자 쓰는 방안에서의 극히 단순한 '살림살이' 조차도 바쁜 것을 핑계로 돌보지 않고 소홀히 하면 이내 지저분하게 되곤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나의 방을 치우고 정리하는 일 못지않게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방을 깨끗이 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내 안에 가득찬 미움과 불평과 오만의 먼지, 분노와 이기심과 질투의 쓰레기들을 쓸어내고 그 자리에 사랑과 기쁨과 겸손, 양보와 인내와 관용을 심어야겠다. 내 방 벽 위에 새로운 마음으로 새 달력을 걸듯이 내 마음의 벽 위에도 '기쁨' 이란 달력을 걸어놓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 이해인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 이해인 처음으로 사랑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하늘색 원피스의 언니처럼 다정한 웃음을 파도치고 있었네 더 커서 슬픔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실연당한 오빠처럼 시퍼런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네 어느 날 이별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남빛 치마폭의 엄마처럼 너그러운 가슴을 열어 주었네 그리고 마침내 기도를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파도를 튕기는 은어처럼 펄펄 살아 뛰는 하느님 얼굴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