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치하에서 숨죽여 온 서인(西人)의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집권 후 이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적폐 청산'이었습니다. 광해군을 옹위하며 15년간 국정을 독점했던 북인을 가차 없이 숙청했습니다. 이때 어찌나 철저하게 숙청이 진행됐는지 조선 후기 역사에서 북인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씨가 마릅니다. 이후 조선 정계는 남인-서인(노론+소론)의 구도로 재편돼 200년간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인 정권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북인계가 있었습니다. '북인'이라는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정계에 살아남았던 이들, 오늘은 질서가 바뀐 세상에서 적폐로 살아남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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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색 당파의 마이너리티, 북인(北人)
기껏해야 선조 후기부터 광해군까지 불과 20년 정도 그야말로 '짧고 굵게' 살다 사라진 정파이다 보니 떠올릴 수 있는 인물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권력의 핵심을 쥐었던 건 정인홍, 이이첨 등이지만 정작 대중에게 잘 알려진 건『홍길동전』을 쓴 허균이나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홍의장군’ 곽재우 정도에 불과하죠.
북인의 사상적 시조로 받들어지는 남명 조식이나 화담 서경덕만 해도 남인의 퇴계 이황이나 서인의 율곡 이이와 비교하면 인지도나 학문적 위세가 확연히 떨어집니다. 그래서인지 이들에 대한 연구도 다른 당파에 비하면 무척 적은 편입니다.
동인은 퇴계 이황 문하의 세력(남인)과 조식·서경덕을 따르는 세력(북인)의 연합체였습니다. 결속력이 끈끈하지 않았던 이들은 '정여립 반란사건'을 계기로 갈라서게 됩니다.
'정여립 반란사건'에서는 이발을 비롯한 북인계 인사들이 대거 처형됐는데('기축옥사'), 같은 동인 세력인 유성룡 등 남인계가 돕지 않은 분열의 씨앗이 됐습니다. '정여립 반란사건'은 당시에도 실체를 놓고 논란이 많았을 뿐 아니라 지금도 대부분의 학자들이 무리한 '사법살인'으로 보는 사건입니다. 그런만큼 북인 측은 이 사건의 국문을 주도한 서인의 영수 정철도 증오했지만 이를 수수방관한 남인계에 대해서도 앙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후 정철이 실각하자 벼르고 있던 북인계는 강력한 처벌을 주장했지만, 남인계가 온건한 처리를 주장하면서 동인의 계파 갈등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양측은 더 이상 한 지붕 아래 활동할 수 없었고, 결국 북인과 남인으로 완전히 나뉘게 됐습니다. 당시 남인 측 주요 인물인 우성전은 남산에 살았고, 북인 측 이발은 북악산에 살아 이런 명칭이 붙었습니다.
정권을 잡으면 내부 권력 투쟁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인조 이후부터는 서인(노론+소론)들의 시대가 열리지만, 선조-광해군 시대만 해도 동인이 우위에 있었습니다. 동·서인의 분당 당시 동인 측이 명분상으로나 수적으로 우세했기에 시간이 갈수록 동인 측이 많이 등용 됐고, '파이'를 둘러싼 내부 다툼도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동인은 비교적 빨리 분화했습니다.
“동인의 경우는 집권한 시기가 길었기 때문에 분열하게 되었지만, 서인의 경우는 집권한 기간이 짧았던 까닭에 온전히 하나로 유지됐습니다.”(『인조실록』 1년 4월 11일)
물론 위에서 언급한 양측의 학맥 차이도 작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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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적 명분보다 실용을 중시한 북인
조식이 남긴 ‘욕천(浴川)’이라는 시에는 “티끌 먼지가 오장에 남았거든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보내리라”는 문구가 있는데, 선비라기보다는 무사가 남긴 표현 같을 정도로 극단적입니다. 또 인생 대부분을 경남 지역에서 보낸 조식은 임진왜란 전부터 일본에 대해서도 대단히 강경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북인이 현실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데는 서경덕의 출신지가 개성이라는 점도 한몫했습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은 조선 시대엔 차별을 받아 고위관료에 등용되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재주 있는 개성 사람들은 상업에 많이 종사했고, 자연히 개성은 조선 그 어느 곳보다 이재에 밝고 상업이 발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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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북인의 부상
조식의 강인하고 반일적 입장과 서경덕의 현실참여적 성향을 이어받은 북인은 임진왜란 때 화의론을 이끌었던 남인에 맞서 강력한 주전론을 펼쳤고, 정인홍·곽재우 같은 스타 의병장을 배출하며 정계에서 발언권이 커졌습니다.
특히 북인 중에서도 이이첨·정인홍이 이끈 대북 세력은 선조 후반 광해군과 영창대군으로 후계구도가 나뉘어 있을 때 광해군을 지지했다가 귀양을 갔는데, 선조의 급사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치적 실세로 급부상했습니다.
'정여립 반란사건' 처리 과정에서 맺힌 응어리가 많았던 북인은 폐쇄적이고 일당 독주적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또, 정권을 잡은 이후엔 내부 분열과 숙청이 이어지며 북인 계파에서도 대북파가 일방적으로 정국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자신은 '군자당(君子黨)', 다른 당은 '소인당(小人黨)'으로 깎아내리는 우월감을 가졌기에 다른 당파를 배제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대북의 폐쇄성이 결국 몰락의 빌미가 됐습니다. 서인뿐 아니라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소북계도 배제한 대북은 인목대비를 폐비하는 과정에서 다시 찬성(대북)-반대(중북)로 분열돼 세력이 약화됐고, 결국 위기 시에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됐습니다.
인조반정 때 서인이 불과 500명의 군사만 동원하고도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서인뿐 아니라 같은 동인계열인 남인까지 반정에 합류하자 어디서도 협력 세력을 찾을 수 없었던 북인, 특히 대북파는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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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의 약점은 경제 실무
100여년 전 중종반정이 폐주(廢主) 연산군 하나를 겨냥해 벌어졌다면 이번 인조반정은 광해군뿐 아니라 북인 정권에 반대했기 때문에 반정 세력으로선 이들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런 피바람에 뚫고 국정에 참여한 북인 출신 관료가 예상보다 많습니다. 한 연구(오수창, 『인조대 정치세력의 동향』)에 따르면 인조 초반 북인 계열로 정치에 참여한 비중은 전체 관료의 9%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당시 재국(才局)이라고 표현되는 실무능력을 갖춘 인사들이었습니다.
서인이 북인계 관료층을 등용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북인이 실천과 실무를 중시한 것에 비해 서인은 명분에 중시했고, 만물의 근원이나 성리학적 질서를 밝히는 데 강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서인이 자신 없는 경제 파트는 북인 중에서도 능력도 있으면서 적폐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인사들에게 맡긴 것이죠. 등용된 이들은 대부분 대북과 갈등을 빚으며 정권 핵심에서 쫓겨난 중북 혹은 소북 출신이었습니다.
북인이 경제 실무를 맡은 배경엔 광해군 시대의 특징도 작용합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은 1608년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이 되던 때입니다. 오랜 전란으로 국토는 크게 황폐해졌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임진왜란 전 150여만 결이 넘던 토지가 전쟁 후에는 30여만 결에 불과했는데, 이는 고려말(50만결)보다도 후퇴한 수준이었습니다. 국부가 매우 감소했지만 그렇다고 세금을 쥐어짤 수도 없었습니다.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정은 '여민휴식(與民休息)'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민간의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전후복구를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세금은 1/3 수준으로 낮추는 대신 이전까지 버려져 있던 땅을 개발하거나 상업과 유통경제를 발달시키는 쪽으로 발상을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염전이나 은광 개발, 동전 주조 등의 정책을 추진하며 상실한 국부를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조선 최대의 세제 개혁으로 불리는 ‘대동법’도 바로 이때 북인들이 추진했습니다.
이때 등용된 대표적 인사로는 김신국, 남이공, 김세렴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김신국은 광해군과 인조 시기를 두루 거치며 6번이나 호조판서(경제부총리)에 올랐고, 남이공은 대사간과 이조판서를 역임했습니다. 이조정랑을 지낸 김세렴은 유형원을 지도하며 훗날 영·정조 시대에 꽃을 피울 실학 태동에 영향을 끼칩니다. 이처럼 이들은 ‘북인’이라는 핸디캡에도 경제에 밝다는 점과 적폐 세력과 함께했지만 적극적이진 않았다는 이유로 ‘반정’ 회오리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정적인 북인을 과감하게 발탁해 경제를 맡긴 서인의 균형 감각도 평가받을 대목입니다. 이후 병자호란에도 인조 정권이 무너지지 않은 점이나, 서인(노론+소론)이 약 200여년 간 꾸준히 집권할 수 있었던 데는 이때 '기초공사'가 나름 튼튼하게 진행된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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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출신 재국(才局)의 퇴장
김동연 경제부총리도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불협화음을 이어가며 결국 교체가 결정됐습니다. 김 부총리는 이명박 정부 경제금융비서관과 기획재정부 2차관, 박근혜 정부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했습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신병주 『北人 학파의 연원과 사상, 그리고 현실인식』·『1623년 인조반정의 경과와 그 현재적 의미』, 조인희 『17세기 초 小北 정권의 성립과정에 對하여』, 우인수 『조선 선조대 남북 분당과 내암 정인홍』 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