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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대청도의 이야기

2018. 10. 2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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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하 여행 전문기자의 休]서해 대청도의 비경
풍경이 이쯤 되면 바다는 시(詩)고 하늘은 그림이며 사람은 신선이다. 물러가는 바다는 못내 아쉬워 모래 위에 거울을 남기고 하늘은 비친 제 모습 부끄러워 구름 불러 가리는데 그런 정도 모르는 무심한 이의 발길만 가볍다. 해뜬 직후 대청도 북단 미아동의 해빈. 대청도(인천 옹진군)에서 summer@donga.com

세상 모든 섬은 애초에 산이었다. 그 애꿎은 운명은 1만2000년 전 빙하기가 끝나며 시작됐다. 녹아내린 빙하로 해수면이 상승하며 잠기는 바람에 그리된 것인데 서해5도(백령, 대청, 소청, 대·소연평도)가 그렇다. 황해도 옹진반도(북한지역)로 이어진 평원의 돌출지형이다. 서해 최북단 백령도(인천까지 항로상 221km)와 옹진반도 서단 장산곶까지 거리는 14km 남짓. 그리고 대청·소청섬은 백령도 남쪽에 일렬로 줄지은 형국. 쾌속페리로 소청∼대청 10분(9.6km), 대청∼백령 20분 거리(12.8km)인데 대청도 삼각산 정상에선 남북의 백령·소청도가 빤히 바라다보인다.

그런데 백령도와 대·소청도는 지형이 판이하다. 평지가 발달한 백령도와 달리 두 섬은 산지가 7할. 이게 백령도에선 농사, 대청·소청도에선 고기잡이가 주업인 이유다. 이런 세 섬에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최근 남북 화해무드(11월엔 북한 해안포까지 철수)를 타고 여행객의 발길이 빈번해진 것이다. 그간 냉랭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런 변화는 극적이다. 지난 20년간 서해5도는 천안함 피격 침몰과 연평도 포격(이상 2010년), 제1·2연평해전(1999년과 2002년)으로 여행기피 대상 1호였다. 그런데 북한의 변화로 경계심이 풀린 요즘은 승선권 구하기가 어려울 만큼 찾는 이가 늘었다. 하지만 대청, 백령 두 섬 모두 선착장이 3000t급 대형선박이 정박할 수 있게 업그레이드돼 앞으로 나아질 전망. 현재 쾌속페리는 2000t급에 머문다.

지난주 이 두 섬을 다녀왔다. 인천시가 인천관광공사와 함께 소청도를 포함한 세 섬의 ‘국가지질공원(National Geo Park)’ 등재를 준비하며 기획한 ‘지오파크 챌린지’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열 개의 국가지질공원이 있다. 심사가 진행 중인 세 섬이 동참하게 되면 북한이란 위협요소로 외면당해온 세 섬이 숨겨진 비경과 매력으로 그 진가를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빈약한 관광자원으로 침체를 벗지 못하고 있는 국내 관광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이 가을에 찾은 대청도의 진면목을 공개한다.  

○ 원나라 황태자의 유배지
 

절해고도(絶海孤島·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섬)가 유배지로 이용된 건 동서양 공통. 그런데 거기서 기사회생해 황제에 오른 이가 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과 원나라 혜종(혹은 순제·1320∼1370)으로 이 둘은 이후 운명마저 같았다. 나폴레옹은 엘바섬(이탈리아)을 탈출(1815년)해 파리로 돌아와 황제에 복귀했다. 하지만 워털루전투 패전으로 백일천하에 그쳤다. 혜종은 1년 5개월 만에 대도(大都·베이징)의 황궁에 돌아가 11대 칸(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그와 원나라도 홍건적의 난중에 득세한 주원장(홍부제·명나라 태조)에게 밀려 몽골초원으로 쫓겨났다.  

그런데 태자 시절 혜종이 유배된 섬은 원나라 땅이 아니었다. 고려의 섬, 이 대청도였다. 아쉽게도 대청도에 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유일한 건 그가 600명 궁인과 거처했던 태자궁터뿐. 대청초등학교가 들어선 산자락이다. 실체와 행방은 묘연해도 황금 유물과 기왓장이 옥죽동 모래언덕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여기서 의문 하나. 당시 원나라는 왜 황태자 유배지로 하필이면 대청도를 선택한 걸까. 그건 섬의 위치와 관련 있다.  

 
당시 베이징∼고려는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육로로 통행했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쓸 당시 청나라 황궁(베이징)을 찾던 루트도 같다. 이 무렵 원 황실은 황위찬탈로 상황이 복잡했다. 13년간(1320∼1333년) 7명의 황제가 오르내릴 정도였다. 부왕 명종(9대)만 해도 3대 무종의 장자였지만 황위 등극까지는 5명의 황제를 거쳤다.

그런데 무종 역시 즉위 반년 만에 독살(1330년)됐다. 황태자 혜종의 유배는 그 직후. 황위는 명종의 등극을 도운 명종의 동생(황태제) 투그테무르를 거쳐 명종의 차남(효종의 이복동생) 영조(10대)에게 양위됐다. 그건 효종 몫이었지만 당시 그가 대청도에 유배된 탓에 그리됐다. 유배가 풀린 혜종은 즉시 황위에 올랐다. 당시 나이는 열세 살. 대청도는 평양과 뱃길로 이어지고 의주는 평양과 멀지 않아 대청도와 베이징은 그리 멀다 할 수 없다. 따라서 대청도 유배는 황제즉위서열 1인자(혜종)의 보호조처로 풀이된다. 혜종의 황위는 1368년까지 35년 이어졌다. 하지만 신생 명나라가 대륙 주인이었던 만큼 나라꼴은 엉망. 효종은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 한편 혜종은 둘째 부인 기황후를 총애했는데 이것도 대청도의 유산이다. 기황후가 고려인 공녀(貢女·요구에 따라 바쳐진 여자)여서다. 기황후는 북원(혜종 사후의 원나라 후속국가)의 2대 황제인 소종의 친모. 그녀는 태자비도 고려여인으로 선택했다.

[출처 :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