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조각상. 사진
한국 스승의 날인 5월 15일이 세종대왕의 생일이라면 대만 스승의 날인 9월 28일은 공자의 생일이다. 중국 대륙에서도 이 날로 스승의 날을 옮긴다했지만 아직은 9월 10일이다. 이 역시 공자의 생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는 기준이 달라 왔다 갔다 하다가 1985년 이후 9월 첫 학기 시작 이후로 책정한 것이다.대만과 중국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같은 유교권 국가에는 모두 공자의 사당인 문묘(文廟) 또는 대성전(大聖殿)이 있다. 문묘의 주인공은 물론 유학의 시조로 불리는 공자다. 하지만 그 외에도 공자의 가르침을 계승한 문도의 위패를 모시고 함께 제사 지낸다. 4자(四子)라 하여 안자(안회) 증자(증참) 자사자(자사) 맹자(맹가)를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받든다. 공자의 수제자 10명을 뜻하는 공문십철(孔門十哲)이 그 다음이요, 다시 십철을 제외한 72현(賢) 중 다른 인물과 한대 송대 명대의 명유(名儒)가 포함된다. 이를 배향(配享)이라 부른다.
한국 문묘에만 빠진 왕양명
사진 한국미술정보센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현(聖賢)이라 함은 엄밀히 말해 여기에 배향된 유학자를 말한다. 그러데 그 구성원이 유독 한국만 다르다. 하나는 있음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없음에서 나온다. 있음은 최치원 설총 안향 정몽주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송시열 같은 한국의 명유를 ‘동국18현’이라 하여 함께 모신 것을 말한다. 일본은 자체 유학자를 배향하지 않았다. 없음은 육구연과 왕수인(왕양명)으로 이어지는 심학(心學) 계열의 유학자가 빠져있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왜 양명학 계통의 유학자가 한국의 문묘에만 쏙 빠졌을까.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 이황이 왕양명의 이론이 겉으론 유학을 내세우지만 속으론 불교와 도교와 다름없다며 유교의 이단자를 일컫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 유성룡은 왕양명에 대해 묻는 선조에게 스승의 말을 전했는데 “만약 이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 그 뜻을 행하였다면 그 화가 진시황 때와 비교해 어느 쪽이 더 심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퇴계는 오로지 전습록만 읽고 “주희의 가르침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고 한 왕양명의 말이 거짓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유학의 본토였던 중국은 물론 조선을 통해 성리학을 수입한 일본에서조차 폭력의 위협과 이익의 유혹에 굴하지 않는 도덕성의 함양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으로 공인받았다.
주자학이 성현의 가르침을 이치에 맞게 이해하는 게 초점을 맞췄다면 양명학은 성현 말씀의 문자적 해석보다 내면의 깨침을 더 중시했다. 불교에 비유하자면 주자학은 교종이고, 양명학은 선종이다. 주희가 기독교 교부철학의 완성자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경전을 집대성한 해석학의 대가라면 왕양명은 종교혁명을 촉발한 마르틴 루터처럼 그 말씀을 내면화해 각자의 실천(지행합일)을 역설한 혁명가였다.
이는 ‘대학’에 등장하는 성인의 덕목으로 팔조목의 해석차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팔조목이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다. 주자학은 뒤의 네 조목을 단계적으로 풀이한다. 먼저 자신의 심신을 닦고, 집안을 평안히 한 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다스리리라는 것이다. 반면 양명학은 이를 동시간적으로 바라본다. 자신의 덕성을 함양하는 일은 평생을 가도 끝내기 어렵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병행할 문제라는 것이다.
만가성인의 유학
왕양명 초상
어떤 사람이 성인군자가 되느냐를 두고도 차이가 발생한다. 중국의 계급질서는 ‘황제-제후-공경-대부-사-서인’으로 이뤄진다. 여기서 공경은 삼공과 구경이라는 고위직을 맡는 상층귀족을, 대부는 중하위귀족을 말한다. 사(士)는 중앙정부의 말단관료거나 제후나 공경의 가신을 뜻한다. 서인은 생산에 종사하는 농부 공인 상인이다. 고대에 성인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황제나 제후여야 가능했다. 공자는 군자라는 말로 그 가능성을 확대했다. 하지만 현실에선 대부 정도까지만 가능했다. 송대 성리학은 이를 사대부로 확산시켰다. 사대부란 대부(大夫)와 사(士)를 합친 단어인데 하위직인 사(士)가 고위직인 대부(大夫)의 앞으로 나서는 역전이 발생했다. 혈통을 중시하는 귀족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선발된 전문 관료가 중앙정치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현상에 조응한 변화였다. 명대에 성립한 양명학은 성인의 경지를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했다. 왕양명의 ‘전습록’에 등장하는 ‘만가성인(滿街聖人)’이란 표현이 이를 상징한다. 온 거리가 성인으로 가득하다는 뜻이다.
양명학의 이런 강렬한 평등의식을 퇴계와 그의 후예들은 간과했다. 동아시아 3국 중에서도 유독 한국에서 천주교 신자가 넘쳐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조선 유학자들이 사농공상 계층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양명학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명학이 상륙하지 못함에 따라 생긴 지적 공백을 ‘천주 앞에 만인의 평등’을 내세운 천주학이 대체했기 때문 아닐까.
[출처: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