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바위산 하나를 놓고 왜? 대서양과 지중해를 여는 '열쇠' 지브롤터
"묘(妙)하다!"
지난달 촬영차 지브롤터를 들렀을 때 이곳을 처음 본 PD의 평가였다. 오랜 세월 전 세계를 누비며 수많은 자연의 절경을 봐왔던 그에게도 지브롤터는 특이했던 모양이다. "주변의 절반은 바다고, 절반은 평지인데 바위산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그 주변을 비구름이 용처럼 휘감고 있으니 정말 신(神)이라도 머무는 듯하다."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러했다. 내게 지브롤터는 언제나 제국(帝國)들이 각축을 벌였던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역사였다. 그런데 옛 지중해의 뱃사람들에게는 왜 이곳이 신화(神話)의 영역이었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됐다. 지브롤터(Gibraltar). 이베리아반도의 남단에 있는 작은 곶(串)이다. 지중해를 향해, 북아프리카를 향해 짧고 가녀리지만 또렷하게 뻗어 나와 있다. 곶의 사방도 평평하다. 가운데 석회암으로 구성된 산 하나만이 홀로 높고 당당하다. 그곳에 올라 바다를 향해 서면 선명하게 바다 건너 육지가 보인다. 아프리카다. 불과 13㎞의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다.
지난달 촬영차 지브롤터를 들렀을 때 이곳을 처음 본 PD의 평가였다. 오랜 세월 전 세계를 누비며 수많은 자연의 절경을 봐왔던 그에게도 지브롤터는 특이했던 모양이다. "주변의 절반은 바다고, 절반은 평지인데 바위산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그 주변을 비구름이 용처럼 휘감고 있으니 정말 신(神)이라도 머무는 듯하다."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러했다. 내게 지브롤터는 언제나 제국(帝國)들이 각축을 벌였던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역사였다. 그런데 옛 지중해의 뱃사람들에게는 왜 이곳이 신화(神話)의 영역이었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됐다. 지브롤터(Gibraltar). 이베리아반도의 남단에 있는 작은 곶(串)이다. 지중해를 향해, 북아프리카를 향해 짧고 가녀리지만 또렷하게 뻗어 나와 있다. 곶의 사방도 평평하다. 가운데 석회암으로 구성된 산 하나만이 홀로 높고 당당하다. 그곳에 올라 바다를 향해 서면 선명하게 바다 건너 육지가 보인다. 아프리카다. 불과 13㎞의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 신화는 지브롤터의 상징과도 같은 바위산의 창조주로 헤라클레스(Hercules)를 지목한다. 그에게 주어진 12개의 과업 중 10번째에 해당하는, 게뤼오네스의 붉은 소 떼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헤라클레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인식 속에 땅끝에 해당하는 이곳까지 오게 됐다. 그는 이베리아반도의 끝에서 대서양과 지중해를 가로막고 있는 산을 둘로 쪼개니, 오늘날 지브롤터의 칼페(Calpe)산과 세우타의 아빌라(Abila)산이다. 정말 옛 그리스인들다운 모험과 낭만으로 가득한 스토리텔링이다. 그렇다면 현실은? 비정(非情)하고 핏빛 가득하다.
이슬람 침공의 교두보가 되다
페니키아인도, 그리스인도, 로마인도 이 바위산의 가치를 알았지만, 전략적으로 십분 활용한 이는 무슬림(Muslim·이슬람교도)이었다. 711년 4월 7000명의 무슬림 정예병을 이끌고 북아프리카에서 해협을 건너는 장군은 타리크(Tariq)였다. 그는 지브롤터를 상륙지로 정했다. 정박, 보급, 정찰, 방어, 퇴각 등 모든 군사작전을 수행하기에 이곳은 완벽했다. 그의 병사들은 바위산을 '타리크의 산'을 뜻하는 'Jabal Tariq'라 불렀다. 오늘날 지브롤터의 어원이다.
이슬람 군대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지브롤터에 상륙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던 서고트족의 내분 때문이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찢긴 서고트족의 지배층이 서슴없이 외세를 불러들인 것이다. 타리크의 원래 임무는 이베리아반도 내의 상황 정찰 정도였다. 판단력이 뛰어났던 타리크는 지금이야말로 이베리아반도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임을 알아챘다. 1만2000명으로 군대를 늘린 타리크는 그해 7월 과달레테(Guadalete) 강변의 메디나-시도니아에서 로드리고(Rodrigo)왕이 이끄는 서고트 군대와 격돌했다. 전력은 서고트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전투 중에 로드리고왕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군대가 배신했다. 로마제국을 무너트린 최강의 전사 부족이란 명성이 누더기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 승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파죽지세(破竹之勢). 지브롤터에 첫발을 디딘 지 불과 4년 만에 타리크의 군대는 이베리안반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기독교의 반격이 시작되다
이슬람 침공의 교두보가 되다
페니키아인도, 그리스인도, 로마인도 이 바위산의 가치를 알았지만, 전략적으로 십분 활용한 이는 무슬림(Muslim·이슬람교도)이었다. 711년 4월 7000명의 무슬림 정예병을 이끌고 북아프리카에서 해협을 건너는 장군은 타리크(Tariq)였다. 그는 지브롤터를 상륙지로 정했다. 정박, 보급, 정찰, 방어, 퇴각 등 모든 군사작전을 수행하기에 이곳은 완벽했다. 그의 병사들은 바위산을 '타리크의 산'을 뜻하는 'Jabal Tariq'라 불렀다. 오늘날 지브롤터의 어원이다.
이슬람 군대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지브롤터에 상륙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던 서고트족의 내분 때문이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찢긴 서고트족의 지배층이 서슴없이 외세를 불러들인 것이다. 타리크의 원래 임무는 이베리아반도 내의 상황 정찰 정도였다. 판단력이 뛰어났던 타리크는 지금이야말로 이베리아반도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임을 알아챘다. 1만2000명으로 군대를 늘린 타리크는 그해 7월 과달레테(Guadalete) 강변의 메디나-시도니아에서 로드리고(Rodrigo)왕이 이끄는 서고트 군대와 격돌했다. 전력은 서고트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전투 중에 로드리고왕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군대가 배신했다. 로마제국을 무너트린 최강의 전사 부족이란 명성이 누더기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 승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파죽지세(破竹之勢). 지브롤터에 첫발을 디딘 지 불과 4년 만에 타리크의 군대는 이베리안반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기독교의 반격이 시작되다
반도의 귀퉁이로 몰렸던 기독교 세력은 악착같이 버텼고,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기력을 회복하자 이슬람 세력에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싸웠다. 역사는 이를 레콩키스타(Reconquista·국토 회복 운동)라 했다. 지브롤터는 레콩키스타의 주요 목표였다. 전략적 중요성에 이곳에서 이슬람의 지배가 시작됐다는 상징성이 보태졌기 때문이다. 기독교 군대와 이슬람 군대 사이의 일진일퇴가 거듭됐다. 1462년 8월 카스티야 왕국의 군대가 지브롤터를 점령했다.
1309년에 양측이 처음 공방전을 벌인 이래 여덟번째 충돌 끝에 찾아온 결과였다. '철(鐵)의 여왕' 이사벨(Isabel·재위 1474~1504)은 지브롤터에 문장(紋章)을 내림으로써 그 가치를 공인했다(1502년). 붉은 성과 거기에 매달린 황금 열쇠. 성(城)은 스페인을 구성하는 중세의 네 개 왕국 중 카스티야를 뜻한다. 핵심은 황금 열쇠다. 지브롤터의 가치를 상징한다. 이곳을 차지한 자는 지중해와 대서양,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해협을 여닫는 열쇠를 손에 쥐게 된다. 대서양으로 가는 뱃길을 열어 세계 제국을 건설하고, 북아프리카와 지중해를 두고 오스만 제국과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벌여야 하는 이사벨에게 그 전략적 가치는 무한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은 지브롤터의 영원한 주인이 될 운명은 아니었다.
대영제국이 열쇠를 손에 쥐다
영국의 해군 제독 조지 루키(George Rooke·1650~1709)가 이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지브롤터를 기습한 건 1704년 8월이었다. 영국은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상대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을 벌이고 있었다. 2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사벨 여왕의 황금기와 합스부르크 왕조의 전성기는 지나갔다. 그래서였을까? 스페인은 황금 열쇠의 전략적 가치를 망각한 채 소규모 수비대만을 지브롤터에 남겨뒀다. 영국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뒤늦게 지브롤터의 가치를 이해한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ⅩⅣ·재위 1643~1715)는 탈환을 위해 대군을 파견했으나, 영국은 잡은 고기를 놓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전쟁은 사실상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는 스페인의 왕위 확보에만 성공했다. 승자(勝者)의 전리품 목록에 영국은 황금 열쇠를 더했다. '영국은 영원히, 어떤 예외나 장애 없이 지브롤터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한다.'(위트레흐트조약 10조) 누군가 '영국에 지브롤터를 차지할 권리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역사를 모르는 이의 우문(愚問)이다. 해양 제국의 야망, 막강한 해군력, 이곳을 차지하겠다는 의지가 영국의 권리였다.
백년 후 이 해협의 주인은?
1309년에 양측이 처음 공방전을 벌인 이래 여덟번째 충돌 끝에 찾아온 결과였다. '철(鐵)의 여왕' 이사벨(Isabel·재위 1474~1504)은 지브롤터에 문장(紋章)을 내림으로써 그 가치를 공인했다(1502년). 붉은 성과 거기에 매달린 황금 열쇠. 성(城)은 스페인을 구성하는 중세의 네 개 왕국 중 카스티야를 뜻한다. 핵심은 황금 열쇠다. 지브롤터의 가치를 상징한다. 이곳을 차지한 자는 지중해와 대서양,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해협을 여닫는 열쇠를 손에 쥐게 된다. 대서양으로 가는 뱃길을 열어 세계 제국을 건설하고, 북아프리카와 지중해를 두고 오스만 제국과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벌여야 하는 이사벨에게 그 전략적 가치는 무한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은 지브롤터의 영원한 주인이 될 운명은 아니었다.
대영제국이 열쇠를 손에 쥐다
영국의 해군 제독 조지 루키(George Rooke·1650~1709)가 이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지브롤터를 기습한 건 1704년 8월이었다. 영국은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상대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을 벌이고 있었다. 2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사벨 여왕의 황금기와 합스부르크 왕조의 전성기는 지나갔다. 그래서였을까? 스페인은 황금 열쇠의 전략적 가치를 망각한 채 소규모 수비대만을 지브롤터에 남겨뒀다. 영국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뒤늦게 지브롤터의 가치를 이해한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ⅩⅣ·재위 1643~1715)는 탈환을 위해 대군을 파견했으나, 영국은 잡은 고기를 놓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전쟁은 사실상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는 스페인의 왕위 확보에만 성공했다. 승자(勝者)의 전리품 목록에 영국은 황금 열쇠를 더했다. '영국은 영원히, 어떤 예외나 장애 없이 지브롤터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한다.'(위트레흐트조약 10조) 누군가 '영국에 지브롤터를 차지할 권리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역사를 모르는 이의 우문(愚問)이다. 해양 제국의 야망, 막강한 해군력, 이곳을 차지하겠다는 의지가 영국의 권리였다.
백년 후 이 해협의 주인은?
스페인도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들에겐 제국의 경륜과 자존심이 남아 있었다. 영국과 세계를 무대로 경쟁하는 프랑스라는 우방도 자산이었다. 1779년 6월 20일 스페인은 프랑스와 손잡고 지브롤터를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포위했다. 대대적이며 전격적인 지브롤터 탈환 작전의 시작이었다. 명분은 미국의 독립전쟁(1775~1783년)으로 촉발된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제공했다. 프랑스는 스페인을 도와 더 큰 그림을 그렸다. 황금 열쇠를 차지해야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영국 해군의 패권을 빼앗을 수 있다. 영국 해군의 패권을 차지해야 미국 독립전쟁도 승리로 이끌 수 있고, 영국 본토에 프랑스 군대를 착륙시킬 수도 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오랜만의 대전략이었다.
생각지 못했던 변수는 영국의 지브롤터 주둔군 사령관 겸 총독인 조지 엘리엇(George Eliott·1717~1790)이었다. 그는 강철 같은 의지와 냉철함을 갖춘 백전노장이었다. 프랑스-스페인의 봉쇄 작전으로 모든 물자가 부족할 것이 뻔했다. 엘리엇은 술과 고기를 끊고 소식(小食)했다. 고립 상태에서 솔선수범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던 것이다. 사방이 봉쇄된 가운데 프랑스-스페인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들은 황금 열쇠를 지켜냈다. 1783년 3월 결국 프랑스-스페인은 지브롤터 탈환 작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영국은 미국 독립전쟁에서는 패배했지만, 지중해와 대서양,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는 여전히 자신들의 손아귀에 움켜쥐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과 1·2차 대전이란 강대국 간의 투쟁에서도 영국은 지브롤터를 빼앗긴 적이 없다. 그래서 이곳은 스페인 안에 존재하는 영국이다. 지브롤터 바위산 높은 곳에 서 보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특별하다. 발을 디딘 곳은 영국인데 육지 쪽은 온통 스페인이다. 반면 눈앞에 잡힐 듯 보이는 광활한 대지는 아프리카 대륙이다. 오른쪽으로는 대서양이, 왼쪽으로는 지중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영국의 핵잠수함이 들락거린다는 이 좁은 해협 사이를 거대한 배들이 줄지어 오간다. 강렬하다!
이곳은 700년 이상 무슬림의 땅이었다. 바위산 중턱에 남은 강인한 외관의 '무어인의 요새'가 이를 증명한다. 그 후 2세기 이상 스페인이 지배했고, 3세기 넘도록 영국이 차지하고 있다. 문득 궁금해진다. 영국은 언제까지 이 황금 열쇠를 손에 쥐고 있을까? 백 년 후 헤라클레스가 산을 쪼개 만들었다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를 차지할 주인공은 누구일까? 지브롤터에서만 유효한 질문이다.
생각지 못했던 변수는 영국의 지브롤터 주둔군 사령관 겸 총독인 조지 엘리엇(George Eliott·1717~1790)이었다. 그는 강철 같은 의지와 냉철함을 갖춘 백전노장이었다. 프랑스-스페인의 봉쇄 작전으로 모든 물자가 부족할 것이 뻔했다. 엘리엇은 술과 고기를 끊고 소식(小食)했다. 고립 상태에서 솔선수범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던 것이다. 사방이 봉쇄된 가운데 프랑스-스페인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들은 황금 열쇠를 지켜냈다. 1783년 3월 결국 프랑스-스페인은 지브롤터 탈환 작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영국은 미국 독립전쟁에서는 패배했지만, 지중해와 대서양,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는 여전히 자신들의 손아귀에 움켜쥐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과 1·2차 대전이란 강대국 간의 투쟁에서도 영국은 지브롤터를 빼앗긴 적이 없다. 그래서 이곳은 스페인 안에 존재하는 영국이다. 지브롤터 바위산 높은 곳에 서 보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특별하다. 발을 디딘 곳은 영국인데 육지 쪽은 온통 스페인이다. 반면 눈앞에 잡힐 듯 보이는 광활한 대지는 아프리카 대륙이다. 오른쪽으로는 대서양이, 왼쪽으로는 지중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영국의 핵잠수함이 들락거린다는 이 좁은 해협 사이를 거대한 배들이 줄지어 오간다. 강렬하다!
이곳은 700년 이상 무슬림의 땅이었다. 바위산 중턱에 남은 강인한 외관의 '무어인의 요새'가 이를 증명한다. 그 후 2세기 이상 스페인이 지배했고, 3세기 넘도록 영국이 차지하고 있다. 문득 궁금해진다. 영국은 언제까지 이 황금 열쇠를 손에 쥐고 있을까? 백 년 후 헤라클레스가 산을 쪼개 만들었다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를 차지할 주인공은 누구일까? 지브롤터에서만 유효한 질문이다.
존 레넌·오노 요코, 지브롤터 홍보대사?
지브롤터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20세기 인물은 전설적인 비틀스의 멤버 존 레넌(John Lennon· 1940~1980)이다. 존 레넌과 오노 요코(1933~)는 1969년 3월 10일 아침 전용기를 타고 이곳으로 날아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10분 만에 끝났고, 둘은 한 시간 후 파리로 돌아갔지만 지브롤터를 전 세계에 알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왜 이곳을 택했을까? 레넌은 "조용하고, 영국이며, 친절해서(Quiet, British and friendly)"라고 했다. 이목을 피해 결혼식 장소를 찾던 영국의 톱스타에게 지브롤터는 완벽한 장소였다.
지브롤터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20세기 인물은 전설적인 비틀스의 멤버 존 레넌(John Lennon· 1940~1980)이다. 존 레넌과 오노 요코(1933~)는 1969년 3월 10일 아침 전용기를 타고 이곳으로 날아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10분 만에 끝났고, 둘은 한 시간 후 파리로 돌아갔지만 지브롤터를 전 세계에 알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왜 이곳을 택했을까? 레넌은 "조용하고, 영국이며, 친절해서(Quiet, British and friendly)"라고 했다. 이목을 피해 결혼식 장소를 찾던 영국의 톱스타에게 지브롤터는 완벽한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