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통신] 개시 ② 의병은 살아있다
무장투쟁 나선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다음달 공판
무장투쟁 나선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다음달 공판
<편집자주>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합니다. 살아 숨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의 역사,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입니다.
◆ 영국 일간신문 <데일리 메일>의 특파원으로 조선을 찾은 프레더릭 매켄지 기자가 정미년(1907)에 찍은 항일 의병들의 모습. 독립기념관.
일제에 붙잡힌 박상진 총사령 등 내달 공판
의병 무장투쟁 계승 “개선가 울리리라 했건만…”
◆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기유년 호남의병에는 중무장선 동원 호남지역 초토화
대담무쌍 광복회 세력 키우자 “씨말리겠다” 안간힘 ◇ 두 달간의 호남 의병 대학살 경술년(1910) 강제병합 전 의병을 초토화하려던 일제의 토벌작전은 잔혹무도하기 그지없었다. 정미년(1907) 충북 제천에서 일본군의 의병 토벌 현장을 목격한 영국 <데일리 메일> 특파원 프레더릭 매켄지 기자의 증언은 이러하다. “그들은 제천을 보복의 표본으로 삼기로 작정했다. 온 마을을 태우기로 한 것이었다. 일본군들은 불길을 돋우어 가면서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부락민들이 피난 갈 때 남자 5명, 부인 1명 그리고 어린아이 1명은 몸을 다쳐 따라가지 못했는데 이들은 불길 속에 사라졌다. (중략) 이제 제천은 지도상에서 없어진 마을이 되었다.” 당시 일본군의 탄압은 ‘밀고’와 ‘대토벌’에 근간을 두었다. 의병장 체포에 큰 상을 걸고 각 부락에 광고하며 밀고자를 장려하고, 의병이 숨어들었던 마을이나 의병에게 물자를 지원한 마을은 무참하게 방화하였다. 정미년 7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일제가 불태운 집은 공식 집계만 6681호라고 한다. 일본군의 <조선폭도토벌지>에 따르면 병오년(1906)부터 5년간 일본군 사상자는 403명이고, 의병 사상자는 2만1485명에 이른다. 민간인 사상자가 포함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피해는 더욱 컸을 것이다. 박상진 총사령의 스승이던 의병장 허위 선생도 의병을 일으킨 죄로 이때 붙잡혀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는 신축된 서대문형무소의 1호 사형수가 되었다. 더욱이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진 기유년(1909)의 ‘호남의병 대학살 사건’은 그 참상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갑오년(1894) 봉기한 뒤 15년간 줄기차게 명맥을 이어온 호남 의병이 사실상 기유년 9월1일부터 10월30일까지의 두 달 사이에 전파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안담살이’(‘담살이’는 머슴살이를 이르는 전라도 방언)로 유명한 보성의 머슴 의병장 안규홍 대장을 비롯한 호남 지역 의병장 103명, 부하 의병 4138명이 이때 체포됐다. 안규홍 대장은 일본군을 야습해 50여명의 일본인을 처단하는 등 신출귀몰한 활약상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곡창지대인 호남의 이권이 이처럼 의병들로부터 위협받는 것을 일제가 보아 넘길 리 없었던 것이다. 대토벌 당시 일제는 대포를 탑재한 중무장 경비선 16척을 건조해 이 중 10척을 전남 도서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입했고 무인도까지 샅샅이 수색하여 의병들을 붙잡았다. 수천명의 병력이 새로 투입됐다. 당시의 일을 매천 황현 선생은 이리 증언했다. “순사들이 촌락을 샅샅이 수색하고 가택마다 조사를 하여 조금만 의심이 나면 즉시 주민을 살해하므로, 이때부터 행인들의 종적이 끊기고 이웃 마을까지도 왕래를 하지 않았다. 한편, 의병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방으로 도주하였으나 그들이 숨을 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힘이 강한 사람은 그들과 싸우다가 사망하고, 약한 사람들은 땅을 기면서 애걸하다가 그들의 칼에 맞아 사망하였으므로 의병들은 점차 그들에게 밀려나 강진, 해남 등 육지가 끝나는 곳까지 쫓기게 되었다.” 체포된 호남 의병장 103명 중 안규홍을 포함한 23명은 경술년에 처형되었다. 포로로 잡힌 의병들은 해남과 장흥, 보성, 낙안, 순천을 경유해 광양과 하동까지 도로를 놓는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이때 닦은 길을 일본군은 ‘폭도 도로’라고 이름 붙여 조롱하였다. 기유년 전체 교전 참전 인원의 60.1%를 차지했던 호남 의병은 이듬해인 경술년 고작 2.3%에 불과할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범윤·안중근 국외로…
“나는 의병장으로 죽는다” 8년간 일제 처단 채응언 등
조선의병 담대한 투쟁은 계속 ◇ 의병은 살아 있다 야만적 대토벌 뒤에도 조선 의병은 후퇴했을 뿐, 패배하지 않았다. 국망을 전후하여 연해주로 터를 옮긴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국외 의병 봉기를 꾀하였다. 병오년 연해주로 이주한 이범윤(63) 대장이 의병부대를 꾸려 일본군에 맞섰고, 그와 뜻을 같이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안중근은 기유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수적 열세와 군자금 부족, 삼엄한 일제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을묘년(1915)까지는 국내에서도 유격전 형태의 의병전쟁이 지속되었다. 8년여간 일제 헌병과 그 가족, 헌병 보조원들을 곳곳에서 처단하여 이름을 떨친 채응언 대장은 그해 7월 평남 성천에서 붙잡혔을 때부터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담대한 태도로 조선 민중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가 평양헌병대 본부로 이송되던 날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골목마다 사람들이 운집하였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그를 가리켜 “사납고, 겁 없고, 담차고, 고집 센 성질이 그 얼굴에 나타났더라”라고 악의적으로 묘사하였으나, “의병을 빙자하고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는 자는 즉시 참수한다. 몰래 술을 먹고 떠들거나 예를 잃는 자는 즉시 참수한다”던 그의 대쪽 같은 성정은 시중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해 11월 일제가 적용한 강도·살인죄로 교수형을 당할 적에도 채응언 대장은 “나는 의병장으로 죽는다”고 말하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 을묘년(1915) 항전 끝에 체포된 마지막 의병장 채응언 선생(오른쪽). 격투 끝에 체포되어 눈 주위가 부어 있고, 팔목에는 붕대를 감은 것으로 보인다. 독립기념관.
△참고문헌
―박걸순, ‘1910년대 비밀결사의 투쟁방략과 의미’, <한국독립운동사연구>(2013)
―조동걸, <대한제국의 의병전쟁>(역사공간·2010)
―김웅, <한의 독립투사 고헌 박상진>(박상진의사 추모사업회·1996)
―이성우, <김좌진>(역사공간·2011)
―프레더릭 매켄지, <대한제국의 비극>(집문당·1999)
―프레데릭 매켄지, <한국의 독립운동>(집문당·1999)
―류시중·박병원·김희곤 역주, <국역 고등경찰요사>(선인·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