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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왕조 이야기

2020. 1. 25. 15:10

 

 

 

태조 이성계 건국후 이단으로 개명

 

 

경복궁 정전 근정전의 입구인 근정문은 왕과 신하가 만나는 조참(朝參)행사를 하던 곳이다. 조참의식은 매달 4회(5·11·21·25일) 열리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의식이 있을 때 왕은 사정전에서 근정전 동쪽 처마 밑을 지나 근정전 마당을 거쳐 근정문에 이른다. 왕은 근정문의 가운데 칸에 어좌를 설치하고 남향으로 앉고, 신하들은 흥례문 일곽에 도열해 임금에게 예를 올렸다. 북이 세 번 울리면 문무백관이 지정된 위치로 돌아가고 왕이 보여를 타고 나타나며, 악대가 풍악을 울린다. 2품 이상의 관원은 영제교(永濟橋) 북쪽 길 동편에, 종친과 무관 2품 이상은 그 서편에 서고, 3품 이하는 다리 남쪽에 선다. 
왕이 자리에 앉으면 전의(典儀)가 부르는 구령에 따라 4배하고, 평신(平身)하면 의식이 종료된다. 이 의식은 모든 신하가 국왕을 알현하는 순수한 의식이었으나, 때로는 의식이 끝난 뒤 조계(朝啓. 업무보고)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즉, 근정문은 단지 드나드는 출입문의 역할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정치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또 근정문 앞의 영역은 왕의 즉위식이 행해졌던 아주 중요한 공간이다.

 
왕조의 새 하늘을 여는 가장 중요한 국가의례 중 하나인 즉위식은 대부분 선왕의 장례기간 중 치러졌다. 장례기간과 맞물려 치러지는 즉위식은 일반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흥겨운 잔치 분위기의 성대한 의식이 아니었다. 국상(國喪)에는 왕이 승하한 뒤 5일 만에 대렴(大斂)하여 빈전(殯殿)을 만들고 그 이튿날에 성복(成服)한다. 성복이란 장례기간 중 복제(服制)에 따라 상복을 입기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선왕의 사망 6일째 되는 성복일에 왕의 후계자는 빈전 앞에 설치한 천막에서 면복(冕服)으로 갈아입고 빈전에서 왕권을 상징하는 대보를 받았다. 근정문까지 여(輿. 뚜껑이 없는 가마)를 타고 가서 문 앞에 남향으로 설치된 어좌에 앉음으로서 새 왕으로 즉위하고 백관의 하례를 받고 교서를 반포했다.

 
선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한 정종, 세종과 세조, 그리고 명종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치렀고 선왕의 승하 후 단종, 성종, 선조가 근정문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선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한 정종, 세종과 세조, 그리고 명종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치렀고 선왕의 승하 후 단종, 성종, 선조가 근정문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와 같이 대부분의 왕들은 선왕의 장례 기간 중에 검소한 즉위식을 정전의 문 앞에서 치렀다. 선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한 정종, 세종과 세조, 그리고 명종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치렀고 선왕의 승하 후 단종, 성종, 선조가 근정문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즉위식을 치른 사왕(嗣王)이 근정전에 오를 때에는 동쪽 계단으로 올라갔다. 이를 즉조(卽祚)라고 해 오른쪽 계단을 이용해 왕위에 오른다는 뜻이다. 왕의 즉위식이 처음부터 정해진 법도에 따라 근정전에서 치러진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의 개국 이후 초기에는 일정한 규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변화에 따른 여러 즉위형태가 등장한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1392년 고려의 구도 개경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했다. 태조의 즉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에 의한 조선의 건국과 맞물려 있으므로 상당히 드라마틱한 상황을 연출했을 것 같은데, 실록 기사는 예상 밖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1392년 이성계 일파는 왕대비(공민왕 정비 안씨)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고, 그해 7월 17일 이성계는 백관의 추대를 받아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태조의 즉위 때 왕대비가 옥새를 넘겨주었는데 태조는 자신은 덕이 없는 사람이라며 굳이 거절하였다. 대소신료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부축해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간절히 권고하니,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마지 못해 수창궁으로 거둥하게 되었다. 백관들이 궁문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올라 여러 신하들의 조하를 받았다.
 

경복궁 근정전 뜰에서 세종대왕 즉위식이 재현되고 있다. 세종이 즉위 교서를 발표한 뒤 용상으로 향하고 있다. 근정문 누각에서 내려다본 즉위식 전경. [중앙포토]

경복궁 근정전 뜰에서 세종대왕 즉위식이 재현되고 있다. 세종이 즉위 교서를 발표한 뒤 용상으로 향하고 있다. 근정문 누각에서 내려다본 즉위식 전경. [중앙포토]

 
태조가 즉위를 재촉하는 백관들을 향해 자신은 덕이 없는 사람이라고 거듭 사양하다가 다시 간절히 권하니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추대에 밀려 마지못해 왕위에 오른 것인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놓고 볼 때, 그 옛날에는 순전히 표면적인 제스처였을 것이지만 그런 형식적인 겸양이 있어야 미덕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에도 심지어 역대 반정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거나 추대되는 모든 왕들이 즉위에 앞서 심하게 울고 사양하는 대목이 실록에 매번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2대 왕 정종은 태조의 둘째 아들로 1398년 8월에 책봉을 받아 왕세자가 되고, 9월에 내선(內禪)을 받아 즉위하였다. 이날 이문화가 세자를 모시고 근정전에 이르렀다. 세자가 강사포(絳紗袍)와 원유관(遠遊冠)을 바꾸어 입고 왕위에 올라 백관들의 하례(賀禮)를 받았다. 면복 차림으로 백관들을 거느리고 부왕(父王)에게 존호(尊號)를 올려 상왕이라 하고, 백관들을 거느리고 절하면서 치하했다. 정종은 조선의 개국이후 처음으로 근정전에서 즉위한 왕이다. 그리고 정종에게 적자가 없다는 이유로 1400년(정종 2년) 2월에 동모제(同母弟) 정안공(靖安公. 태종 이방원)이 책봉을 받아 왕세자가 되었다. 그해 11월 정종이 별궁에 물러앉고 선위하니, 울면서 사양하다가 예궐(詣闕)해 조복을 갖추고 수창궁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그런데 정종으로부터 선위의 말을 들었을 때 태종은 울면서 사양하고 송구한 마음을 품었다고 했다. 과연 역사의 기록에서 보듯 두 번씩이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죽인 태종의 야망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마당에 웃음이 나오는 눈물이요 사양이 아닌가 싶다. 정종은 속 편하게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천수를 누리다가 63세에 승하하였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재현되는 세종대왕 즉위식. [중앙포토]

경복궁 근정전에서 재현되는 세종대왕 즉위식. [중앙포토]

 
3대 태종은 다시 세종에게 선위하니 조선왕조 초기에는 즉위의 형식이 선왕의 사후 적장자에 의해 승계되는 게 아니라 대부분 그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변칙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왕조의 왕권 승계가 왕의 적장자인 왕세자에게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문종의 즉위였다. 문종은 조선 건국 이래 적장자로 난이나 세자 교체 없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왕이었다. 문종은 8살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왕도를 배우고 세종 말년에는 건강이 좋지 않은 부왕을 대신해 8년간이나 대리청정을 하였다. 대신들은 법도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세종은 1443년(세종 25) 왕세자가 섭정하는 제도를 만들고, 이에 따라 1445년(세종 27)부터 본격적으로 모든 정무를 세자가 맡아보게 되었다. 문종은 29년 동안이나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준비된 왕이었다.

 
1450년(세종 32) 2월 세종이 승하하자 문종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문종은 근정전이 아닌 궁궐 밖에서 즉위했다. 세종이 막내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승하하는 바람에 문종은 영응대군 사저에서 즉위를 하게 되었다. 왕이 궁궐 밖에서 즉위례를 치른 것이다. 1450년 2월 22일 문종은 면복 차림으로 빈전 문밖의 장전(帳殿: 임금이 앉도록 임시로 꾸민 자리)에 나가서 즉위의 예식을 행하였는데, 견디지 못할 만큼 슬피 울어서 옷소매가 다 젖었다. 즉위례를 치른 임금은 면복을 벗고 상복을 다시 입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3개월 만인 1452년(문종 2) 5월에 39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재위 고작 2년 3개월보다 왕세자로 부왕 세종을 도와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29년이 오히려 문종의 치세였다. 원래부터 몸이 허약했던 문종이 모후(母后) 소헌왕후와 부왕 세종의 삼년상을 연이어 치르느라 건강을 해쳐 고작 재위 2년 만에 승하하고 말았고, 이는 자신의 왕위를 이은 아들 단종을 고립무원으로 내몰게 된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문종이 죽자 종법에 따라 그의 적장자인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단종의 나이는 12세였고 왕실에는 또 하나의 비극이 시작되고 있었다.
 

[출처: 중앙일보]

 

 

 

 

 

 

 

 

 

 

임금의 수명

 

제1대 태조
청심원을 다 삼키지 못하고, 중풍으로 74세에 승하

(아들 태종과의 마찰로 인한 홧병도 그 원인 중 하나)
능은 건원릉 동구릉안에 있다.

 

제2대 정종

오복(五福 ; 수,부,강녕,유호덕,고종명)을 다 갖추고

63세에 승하 (상왕으로 물러난 후 편안하게 살면서

가장 많은 자식을 둔 왕임)

조선역대왕 중, 유일하게  북한에 있는 후릉

(경기도 판문군 영정리)

 
 제3대 태종
상왕으로 물러난 후 태종은 폐렴으로 56세에 승하
부인 민씨도 학질로 56세 졸.

능은 헌릉

 

제4대 세종
대식가로 당뇨병으로 54세에 승하
(고기를 매우 즐긴 왕..
식단에 항상 고기가 있었음, 그래서 종기가 많이 났음)
(그리고 여러 부인을 둔 만큼 성병도 있었다고 함)
소형왕후 심씨와 합장함으로써 조선최초 합장릉

능은 영릉 

 

제5대 문종
등창으로 39세에 승하, 아버지 세종을
닮아

몸이 허약했음

 

능은 현릉

 

제6대 단종
수양대군의 '계유정란'으로 17살때 서인(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에서 사사됨 숙종때 단종으로 복위.

능은 장릉


 

제7대 세조
악업으로 문둥병과 불면증으로 52세에 승하.
 

능은 광릉

제8대 예종
20세에 복상사 하여 승하
안순왕후 한씨 정사를 즐기다 승하했으며,
형 의경세자(성종의 아버지, 덕종)

도 20세에 급사

능은 창릉

 

제9대 성종
등창과 폐병으로 38세에 승하
28명의 자식을 두었고 주색을 즐긴 카사노바였다. 
임진왜란때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에 태워지는 수모를 격는다.

능은 선릉

제10대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유배 강화도에서 괴질로 31세
아들 넷은 강화도에서 사사됨
묘는 서울 방학동
 
제11대 중종
거머리로 등창을 치료하다,
울화병과 노환으로 57세에 승하.  재위 39년
능은 정릉

제12대 인종
이질로 31세 승하(문정왕후에 의한 독살설도 있다.)
하늘이 낳은 효자로 알려져 있으며, 후사가 없다.
능은 효릉  
  
제13대 명종
지나친 방사로 34세에 승하
문정왕후의 아들로 마마보이로 성장하였으며,
무수리출신 장씨와 지나친 방사로 인한 졸지에 승하
어머니 문정왕후한테 회초리도 맞았다고 함
능은 강릉

제14대 선조
임진왜란 이후 중풍으로 57세에 승하
영조 다음으로 41년간 재위
능은 목릉
 
제15대 광해
가장 불운한 왕,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후 유배
그 뒤 십수년을 더 살다가 제주도에서 67세로 졸
(유배 생활 중에 시중 드는 사람이
'영감'이라고 불러도 꿋꿋하게 견뎠다 함)
이때 담배가 일본에서 들어옴

제16대 인조
청나라에게 항복한 후, 홧병 걸림
신하들 손아귀에서 울화병으로 55세에 승하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한(?) 왕으로 보고있으며,
재위중 늘 그것때문에 신하들에게 시달려 왔으며
능은 장릉
 
제17대 효종
봉림대군 수전증있는 어의의 실수로 출혈사로 41세에 승하
강한의지의 북벌정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승하했으며,
능은 영릉

제18대 현종
청 황제에게 벌금형을 받은 임금으로 학질과 과로로

  34세에 승하

'하멜'에 의해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능은 숭능

제19대 숙종
어릴 적 천연두 후유증, 노인병, 등창 심한
당파 싸움으로인한 스트레스로 60세에 승하
(인현왕후, 장희빈과의 문제도 있었을 듯)
풍류를 즐겼던 숙종은 봄이면 3000 후궁을 거느리고
큰잔치 별렸다한다
능은 명릉

제20대 경종
게장을 먹다 급사하여 37세에 승하
장희빈이 사약을 받기전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하자 거절하다
인정에 끌려 세자를 데려오자 갑자기 경종의 하초잡아당겨
성기능을 잃어 내시와 같았다 한다.
능은 의릉

제21대 영조
장수하였으며 치매로 83세에 승하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을 강등 한후 뒤주속에 가둬
굶어죽게한 일과 늙어 노망 부린것이 오점으로 남았으며,
일본에서 '조엄'이 고구마를 처음 가져왔다.
능은 원릉

제22대 정조
개혁적인 군주, 사도세자(장조)의 아들 등창으로 49세에 승하
(독살설도 있지만, 최근 자료로 보아

등창으로 승하한게 맞다고 봄)

안경을 처음 쓴 임금. 

 능은 건릉

제23대 순조
매독 3기로 45세에 승하.
이때 나라는 콜레라가 창궐했으며,

 

안동김씨 세도가 시작되었다.
능은 인릉

제24대 헌종
23세에 술과여자로 보내다 폐결핵으로 승하.
능은 경릉

제25대 철종
세도정치에 의해 졸지에 왕이 된 강화도령

33세 폐결핵으로 승하

강화도를 그리워 하며, 안동김씨 그늘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채 살았다.

능은 예릉

제26대 고종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되어 67세에 승하.

능은 홍릉

제27대 순종
몸이 허약했고, 남성 구실을 못했다 함..
1926년, 라디오 들으면서 심장마비로 53세 승하.
능은 유릉

의친왕
독립운동을 했던 고종의 아들,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형
그의 아들 이우 왕자가 얼짱 왕자로 유명해졌다.
현재 의친왕의 아들과 손자들이 다수 생존해 있다.

1955년, 6.25전쟁 중에 걸린 영양실조로 79세로 서거
묘는 홍유릉 내의 의친왕 묘(합장묘) 

의민황태자 영친왕
어릴 때 일제에 볼모로 잡혀간 비운의 황태자다.
1963년 뇌혈전증으로 귀국해 7년간 병상에서 생활하다가
1970년 74세의 나이로 서거
 
왕비인 이방자 여사는 자선 활동을 하다가 1989년 서거
능은 홍유릉 내의 영원(합장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