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왜 충청도는 감리교, 전라도는 장로교가 많을까
◇영국에서 시작된 세 교파-성공회, 감리교, 구세군
1990년대 초반 광화문 사거리 옛 국제극장 자리에 새 빌딩이 들어섰습니다. 조선일보 편집국 근처라 그 앞을 자주 지나곤 했는데, 건물 앞엔 큰 돌에 ‘감리회관’이라고 적혀 있었죠. 처음에는 그 건물이 건설 감리 회사들의 회관인 줄 알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감리’는 한자로 쓰면 건설감리나 감리교나 똑같이 ‘監理’입니다. 그 건물이 감리교 교단(정식 명칭은 기독교대한감리회) 건물이란 걸 알게 된 것은 꽤 시간이 지나서였습니다. 감리교는 영어로는 ‘Methodist church’입니다. 직역하면 ‘규칙주의자 교회’쯤 되겠지요.
감리교 창시자인 영국의 존 웨슬리(1703~1791) 목사가 옥스퍼드 대학생일 때 엄격한 신앙생활을 고수하자 친구들이 ‘규칙 쟁이’라고 불렀던 데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태동하고 있었습니다. 감리교 목사들은 보다 실질적으로 서민들의 생활을 챙기며 전도 일선에 나섰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사회적 공감을 얻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더욱 교세를 확장했습니다.
서울 광화문 사거리의 감리회관. 흔히 동화면세점으로 알려진 이 건물은 한국 감리교(기독교대한감리회)의 본부다. 필자처럼 헷갈리는 사람을 위해서인지 외벽엔 '감리교 본부'라고 적었다.
존 웨슬리는 본인을 포함해 4대째 성공회 사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성공회는 한국에서는 개신교로 분류되지만 전례(典禮)를 비롯해 교구 중심제, 사제-주교-대주교 등의 명칭까지 천주교와 닮은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교회 시스템으로 볼 때 감리교는 천주교 혹은 성공회와 유사합니다. 천주교와 성공회는 교구(敎區)가 있고, 교구장 주교가 교구를 관리하지요. 감리교의 지역 조직인 연회(年會)는 교구와 유사하고, 연회의 장(長)인 감독(監督)은 교구장 주교(主敎)와 같은 형식입니다. 감독은 영어로는 ‘비숍(bishop)’ 즉 주교와 똑같습니다. 또 개별 교회의 담임목사는 원칙적으로 연회에서 파송하는 형식입니다. 마치 천주교 혹은 성공회의 교구장이 개별 성당의 주임 사제를 파견하는 것과 같지요. 정리하면, 장로교가 장로를 통한 대의(代議)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했다면 감리교는 감독회장(총회장), 감독, 담임목사로 이어지는 천주교 혹은 성공회의 중앙 집중적 시스템을 택한 셈이지요.
성공회 사제 출신으로 감리교를 창시한 존 웨슬리 초상.
◇미국 감리교엔 ‘장로’가 없다는데...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복을 입은 모습. 한국 감리교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입국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렇지만 귤도 위수(황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한국적 상황에서 감리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장로’입니다. 장로는 장로교의 특징이지요. 원래 한국에 전래된 감리교에는 장로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미국 감리교에는 장로라는 직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장로교가 개신교의 표준이 되다시피하자 감리교에도 장로가 생기게 됐습니다. 장로교 교회는 세례를 받고 입교한 후 일정한 절차를 거쳐 집사, 권사, 안수집사, 장로 등의 직분을 맡습니다. 그런데 감리교 교회는 장로라는 직분이 없다보니 뭔가 섭섭했던(?) 것이죠. 그래서 한국 감리교에는 미국에는 없는 장로 직분이 생겼다고 합니다. 반대로 장로교회에서 여성 교인에게 부여하는 ‘권사’라는 직분은 원래는 장로교가 아닌 감리교의 제도였다고 합니다. 감리교와 장로교가 서로 직분을 주고 받은 셈이지요.
담임목사직도 연회에서 파송하기 보다는 개별 교회에서 청빙하거나 교회를 개척하고 담임목사직을 맡는 방식으로 변화했지요. 물론 지금도 개별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기 위해서는 감독의 허락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변화에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장점으로는 김선도(광림교회)·고(故) 김홍도(금란교회)·김국도(임마누엘교회) 3형제 목사의 예에서 보듯이 세계적 규모의 감리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는 점도 꼽히겠지요.
아펜젤러 선교사가 설립한 정동제일교회. /김한수 기자
◇성공회에서 감리교, 감리교에서 구세군 탄생
찬바람 불 때쯤이면 거리에 등장하는 ‘자선냄비’로 낯익은 구세군도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구세군을 창시한 윌리엄 부스(1829~1912)는 본디 감리교 목사였습니다. 당시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한창이었죠.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 런던의 빈민굴에서 전도하던 부스는 기존 방식의 선교로는 빈민들의 비참한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고 판단해 군대 조직을 본뜬 새 교단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구세군(Salvation Army)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공회에서 감리교, 감리교에서 구세군이 나온 셈이지요.
서울 정동의 구세군 대한본영(본부) 옛 건물. 현재 구세군 본부는 충정로로 옮겼다. /김한수 기자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 동시에 한국에 입국
재미있는 점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본격적인 개척 선교사가 한 날 한 시에 입국했다는 점입니다. 1885년 부활절이던 4월 5일 아펜젤러(감리교)와 언더우드(장로교)는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항에 내렸습니다.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는 미혼, 아펜젤러 선교사는 아내와 함께 왔습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당시 언더우드가 아펜젤러 부인에게 양보해 한국 땅에 먼저 발을 디딘 것은 감리교였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경쟁보다는 협력 관계였다는 것을 상징하는 에피소드이지요.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 아펜젤러는 정동교회를 각각 세워 한국 장로교와 감리교의 뿌리를 심었지요.
서울 정동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영국 성공회에서 시작된 감리교와 구세군은 서울 정동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 이내에 이웃해 있었다. /김한수 기자
◇ 감리교는 충청도, 장로교는 전라도로 선교 지역 나눠
이후 점차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서 파견되는 선교사가 늘면서 각 교파별 선교 지역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논의가 있었답니다. 1892년부터 논의를 시작해 1893년에 대략적인 선교지를 나눴고, 최종적으로는 1909년에 확정했답니다. 대체적으로 장로교는 평안도와 경상도 그리고 전라도, 감리교는 황해도와 인천 등 서해안, 충청도, 강원도지역 선교를 맡기로 했답니다. 충남 천안 출신인 유관순 열사의 학업을 도운 사애리시 선교사도 감리교 소속이었습니다. 물론 서울·경기를 비롯해 겹치는 선교 지역도 많았지요. 그렇지만 100 여 년 전의 선교 지역 구분은 지금도 영향이 남았습니다.
같은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이지겠지만, 지금도 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 감리회관과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 구세군 대한본영은 서울 정동 주한영국대사관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 이내에 이웃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새문안로 건너편엔 장로교의 ‘어머니 교회’인 새문안교회도 이웃하고 있고요. 서울 정동 일대가 한국 개신교의 요람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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