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erature(문학)/Poem(시)

이해인 시 모음(꽃01)

2018. 3. 17. 12:26

 

 

 

 

봉숭아

 

한여름 내내

태양을 업고

너만 생각했다


이별도 간절한 기도임을

처음 알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잊어야 할까


내가 너의 마음 진하게

물들일 수 있다면

네 혼에 불을 놓는

꽃잎일 수 있다면


나는

숨어서도 눈부시게

행복한 거다

 

 

 

 

 

 

 

 

 

매화 앞에서

 

보이지 않기에

더욱 깊은

땅속 어둠

뿌리에서

줄기와 가지

꽃잎에 이르기까지

먼 길을 걸어온

어여쁜 봄이

마침내 여기에 앉아 있네


뼛속 깊이 춥다고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하던

희디흰 봄햇살도

꽃잎 속에 접혀 있네


해마다

첫사랑의 애틋함으로

제일 먼저 매화 끝에

피어나는 나의 봄


눈 속에 묻어두었던

이별의 슬픔도

문득 새가 되어 날아오네

꽃나무 앞에 서면

갈 곳 없는 바람도

따스하여라


'살아갈수록 겨울은 길고

봄이 짧더라도 열심히 살 거란다

그래, 알고 있어

편하게만 살 순 없지

매화도 내게 그렇게 말했단다'

눈이 맑은 소꿉동무에게

오늘은 향기 나는 편지를 쓸까


매화는 기어이

보드라운 꽃술처럼 숨겨두려던

눈물 한 방울 내 가슴에 떨어뜨리네

 

 

 

 

 

 

 

 

 

도라지 꽃

 

엷게 받쳐 입은

보라빛 고운 적삼


찬 이슬 머금은

수줍은 몸짓


사랑의 순한 눈길

안으로 모아


가만히 떠 올린

동그란 미소


눈물 고여오는

세월일지라도


너처럼 유순히

기도하며 살고 싶다


어느 먼 나라에서

기별도 없이 왔니


내 무덤가에 언젠가 피어

잔잔한 연도를 바쳐 주겠니

 

 

 

 

 

 

 

백합의 말 / 이해인 

 

 

지금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만나

되살아 난

목숨의향기

 

캄캄한 가슴속엔

당신이 떨어뜨린

별 하나가 숨어 살아요

 

당신의 (부재)不在 조차

절망이 될수 없는

나의 믿음을

 

승리의 향기로

피워 올리면

흰옷 입은

천사의 나팔소리

 

나는 오늘도

부활하는 꽃이예요

 

 

 

 

 

 

 

해바라기 연가 / 이해인

 

 

내 생애가 한 번뿐이듯
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

나의 임금이여
폭포처럼 쏟아져 오는 그리움에
목메어
죽을 것만 같은 열병을 앓습니다.

당신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내 불치의 병은
사랑

 

 

 

 

 

 

 

진달래 / 이해인

 

해마다 부활하는
사랑의 진한 빛깔 진달래여
네 가느단 꽃술이 바람에 떠는 날
상처입은 나비의 눈매를 본 적이 있니
견딜 길 없는 그리움의 끝을 너는 보았니

봄마다 앓아 눕는
우리들의 지병은 사랑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한 점 흰구름 스쳐가는 나의 창가에
왜 사랑의 빛은 이토록 선연한가

모질게 먹은 마음도
해 아래 부서지는 꽃가루인데
물이 피 되어 흐르는가
오늘도 다시 피는
눈물의 진한 빛깔 진달래여

 

 

 

 

 

 

튤립을 닮은 동무 / 이해인

 

 

동무야

잘 있었니?


내가 슬프고 우울할 때

가장 환한 기쁨과

웃음의 불을 켜서

당겨주던 꽃

튤립을 닮은 나의 동무야

 

 

 

 

 

 

 

 

 

차를 마셔요, 우리 / 이해인

 

오래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찻잔을 사이에 두고

우리 마음에 끓어오르는

담백한 물빛 이야기를

큰 소리로 고백하지 않아도

익어서 더욱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함께 차를 마셔요


오래 기뻐하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산을 닮은 어진 눈빛과

바다를 닮은 푸른 지혜로

치우침 없는 중용을 익히면서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지닐 수 있도록

함께 차를 마셔요


오래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 세상 일들

혼자서 만들어 내는 쓸쓸함

남이 만들어 준 근심과 상처들을

단숨에 잊을 순 없어도

노여움을 품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며 함께 차를 마셔요


차를 마시는 것은

사랑을 마시는 것

기쁨을 마시는 것

기다림을 마시는 것이라고

다시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가 서로의 눈빛에서 확인하는

고마운 행복이여


조용히 차를 마시는 동안

세월은 강으로 흐르고

조금씩 욕심을 버려서

더욱 맑아진 우리의 가슴속에선

어느 날 혼을 흔드는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들려올 테지요?

 

 

 

 

 

 

 

코스모스  / 이해인

 

몸달아

기다리다

피어오른 숨결


오시리라 믿었더니

오시리라 믿었더니


눈물로 무늬진

연분홍 옷고름


남겨 주신 노래는

아직도

맑은 이슬


뜨거운 그 말씀

재가 되겐 할 수 없어


곱게 머리 빗고

고개 숙이면


바람 부는

가을길


노을이 탄다

 

 

 

 

 

 

 

분꽃에게

 

사랑하는 이를 생각할 때마다

내가 누리는

조그만 천국


그 소박하고도 화려한

기쁨의 빛깔이네

붉고도 노란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땅에서도

태양과 노을을 받아 안고

그토록 고운 촛불

켜 들었구나


섣불리 말해 버릴 수 없는

속 깊은 지병(持病)

그 끝없는

그리움과 향기이네


다시 꽃피울

까만 씨알 하나

정성껏 익혀 둔 너처럼


나도 이젠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도의 씨알 하나

깊이 품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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