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님
李海仁은 자연과 삶의 따뜻한 모습, 수도사로서의 바람 등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해인"이라는 이름은 필명이며, 본명은 이명숙이다. 세례명은 클라우디아.
꿈길에서 2 / 이해인
나는 늘
꿈에도
길을 가지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멀고도 좁은 길을
낯익은 사람
낯선 사람
꿈속에선 모두
가까운 동행인이 되지
꿈속의 길이라고
더 새롭지도 않은
나의 평범한 길을
열심히 걷다 보면
깨어나서도 내내
기쁨으로 흘러가는
나의 시간들
마음도 걸음도
흩어지지 않으려고
꿈에도 연습을 많이 했지
나를 길들이며
누구에게나
떳떳하고 아름다운 이웃으로
문을 열고 싶었지
편지 / 이해인
- 대모님께
"눈은 볼수록 만족지 않고
귀는 들을수록 부족을 느낀다"는
책 속의 말을
요즘은 더 자주 기억합니다
진정
눈과 귀를
깨끗하게 지키며
절제 있는 삶을 살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시대 탓을 해야 할까요
집착을 버릴수록 맑아지고
욕심을 버릴수록 자유로움을
모르지 않으면서
왜 스스로를
하찮은 것에 옭아매는지
왜 그토록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말하려고 하는지
오늘은 숲속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하늘에 떠다니는 흰구름처럼
단순하고 부드럽고
자유로운 삶을 그리워했습니다
저도 그 분의 흰구름이 되도록
꼭 기도해주십시오, 대모님
차를 마셔요, 우리 / 이해인
오래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찻잔을 사이에 두고
우리 마음에 끓어오르는
담백한 물빛 이야기를
큰 소리로 고백하지 않아도
익어서 더욱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함께 차를 마셔요
오래 기뻐하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산을 닮은 어진 눈빛과
바다를 닮은 푸른 지혜로
치우침 없는 중용을 익히면서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지닐 수 있도록
함께 차를 마셔요
오래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 세상 일들
혼자서 만들어 내는 쓸쓸함
남이 만들어 준 근심과 상처들을
단숨에 잊을 순 없어도
노여움을 품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며 함께 차를 마셔요
차를 마시는 것은
사랑을 마시는 것
기쁨을 마시는 것
기다림을 마시는 것이라고
다시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가 서로의 눈빛에서 확인하는
고마운 행복이여
조용히 차를 마시는 동안
세월은 강으로 흐르고
조금씩 욕심을 버려서
더욱 맑아진 우리의 가슴속에선
어느 날 혼을 흔드는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들려올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