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erature(문학)/Poem(시)

이해인 시 모음( 01)

2018. 3. 10. 11:34

 

 

 

 

 

 

살아있는 날은 / 이해인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있는 연필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꿈길에서 1

 

살아 있는 동안은

매일 밤 꿈을 꾸며

조금씩 키가 크고

마음도 넓어지네


꿈에 가보는

그 많은 길들과

약속 없이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낯설고 낯익은

꿈속의 현실이

소리 없이 가르쳐준

삶의 이야기들


한 번 꾸고

사라질 꿈도

삶을 빛내느니

세상 어디에도

버릴 것은 없어라


살아 있어 꿈을 꾸고

꿈이 있어 행복하다고

나는 말하리

 

 

 

 

 

사랑한다는 말은 / 이해인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

사랑한다는 말은
한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거대한 밤하늘이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마디의 말

그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고향의 달 / 이해인


 

강원도의 깊은 산골에서
내가 태어날 무렵
어머니가 꿈속에서 보았다는
그 아름다운 달

고향 하늘의
밝고 둥근 달이
오랜 세월 지난 지금도
정다운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네

'너는 나의 아이였지
나의 빛을 많이 마시며 컸지'
은은한 미소로 속삭이는 달

달빛처럼 고요하고
부드럽게 살고 싶어
눈물 흘리며 괴로워했던
달 아이의 지난 세월도
높이 떠오르네

삶이 고단하고 사랑이 어려울 때
차갑고도 포근하게
나를 안아주며 달래던 달

나를 낳아준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그리고 또 어머니
수많은 어머니를 달 속에 보네

피를 나누지 않고도
이미 가족이 된 내 사랑하는 이들
가을길 코스모스처럼 줄지어서
손 흔드는 모습을 보네

달이 뜰 때마다 그립던 고향
고향에 와서 달을 보니
그립지 않은 것 하나도 없어라

설레임에 잠 못 이루는 한가위 날
물소리 찰랑이는 나의 가슴에도
또 하나의 달이 뜨네

 

 

 

 

 

이해인 수녀님 

 

仁은 자연과 삶의 따뜻한 모습, 수도사로서의 바람 등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해인"이라는 이름은 필명이며, 본명은 이명숙이다. 세례명은 클라우디아.

 

 

 

 

 

꿈길에서 2  / 이해인

 

나는 늘

꿈에도

길을 가지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멀고도 좁은 길을


낯익은 사람

낯선 사람

꿈속에선 모두

가까운 동행인이 되지


꿈속의 길이라고

더 새롭지도 않은

나의 평범한 길을

열심히 걷다 보면

깨어나서도 내내

기쁨으로 흘러가는

나의 시간들


마음도 걸음도

흩어지지 않으려고

꿈에도 연습을 많이 했지

나를 길들이며

누구에게나

떳떳하고 아름다운 이웃으로

문을 열고 싶었지

 

 

 

 

 

 

 

 

편지 / 이해인

 

 

- 대모님께 

"눈은 볼수록 만족지 않고

귀는 들을수록 부족을 느낀다"는

책 속의 말을

요즘은 더 자주 기억합니다


진정

눈과 귀를

깨끗하게 지키며

절제 있는 삶을 살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시대 탓을 해야 할까요


집착을 버릴수록 맑아지고

욕심을 버릴수록 자유로움을

모르지 않으면서

왜 스스로를

하찮은 것에 옭아매는지

왜 그토록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말하려고 하는지

오늘은 숲속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하늘에 떠다니는 흰구름처럼

단순하고 부드럽고

자유로운 삶을 그리워했습니다

저도 그 분의 흰구름이 되도록

꼭 기도해주십시오, 대모님

 

 

 

 

 

 

차를 마셔요, 우리 / 이해인

 

오래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찻잔을 사이에 두고

우리 마음에 끓어오르는

담백한 물빛 이야기를

큰 소리로 고백하지 않아도

익어서 더욱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함께 차를 마셔요


오래 기뻐하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산을 닮은 어진 눈빛과

바다를 닮은 푸른 지혜로

치우침 없는 중용을 익히면서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지닐 수 있도록

함께 차를 마셔요


오래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 세상 일들

혼자서 만들어 내는 쓸쓸함

남이 만들어 준 근심과 상처들을

단숨에 잊을 순 없어도

노여움을 품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며 함께 차를 마셔요


차를 마시는 것은

사랑을 마시는 것

기쁨을 마시는 것

기다림을 마시는 것이라고

다시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가 서로의 눈빛에서 확인하는

고마운 행복이여


조용히 차를 마시는 동안

세월은 강으로 흐르고

조금씩 욕심을 버려서

더욱 맑아진 우리의 가슴속에선

어느 날 혼을 흔드는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들려올 테지요?


 

 

 

 

 

 

 

 

 

 

행복수첩 / 이해인 

 

 

앞을 봐도 기쁘고
옆을 봐도 즐겁고
뒤를 봐도 마냥 행복하다'

세상 떠난 어머니가
내게 남기고 가신
행복수첩을 읽으며
나도
동서남북 어디서나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지
빙긋이 웃으며
결심해본다

`나는 많은 사람들 위해
움직이는 사랑의 집
선물의 집이 될 거야
요술공주 위로천사
모두모두 다 할 거야'

어린 날의
행복수첩에 적힌 글을
다시 읽으며
남은 날들
그렇게 살아야지
다심해본다

불가능도 가능케 하는
마술사인 애인 덕에
난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호수 앞에서 /  이해인

 

호수는

늘 고요하고

말이 없어

좋다고 하지만


너무 고요하면

두렵지 않은가요?


때로는

흔들리는 모습도 보여주고

적당히 소리도 내야

편하지 않은가요?


문득

사람도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너무 조용해서

두려운 당신


오래 쌓아올린

침묵을 깨고

무어라고 나에게

말 좀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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