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의상봉 코스는 제법 까칠하다. 겨울바람은 북서쪽에서 들이닥쳐 몸을 순간냉각 시킨 뒤 숨도 안 쉬고 남동쪽으로 넘어간다. 등산객 얼굴에 주름상자가 잠깐 그려진다. 서울 은평구 진관동 백화사를 들머리로 오르면 까슬한 바위가, 차진 흙이, 바닥다짐한 눈이, 곧추선 나무가, 나풀대는 풀이 여러 조합으로 기다리고 있다. 대남문까지 7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반복은 다리의 고단함뿐 아니라 마음가짐의 흐트러짐을 경계하게 만든다. 자칫, 힘을 미리 빼거나 방심하면 다음 봉우리를 기약할 수 없음이다. 그러니까 이 의상 능선의 진정한 묘미는 아릿한 굴곡에 있다. 북한산의 백미로 치는 이유다.
북한산 의상능선의 봉우리명들은 불교와 얽히고설켜 원효에 깨달음 줬다는 '해골 속 물 이야기' 근거 없어
의상봉과 그 맞은편 원효봉 이름 빚은 지도자격 고승 민초 위해 손 내밀었는데 지금의 우리 모습은 어떤가
북한산 의상봉에서 바라본 서울 은평구 진관동 북한산성 입구. 김홍준 기자.
북한산 의상능선의 증취봉에서 바라본 용혈봉, 용출봉, 의상봉. 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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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과 유학길 오른 원효…해골물 마셨다는 기록 없어
의상(義湘, 625~702)은 신라의 진골 출신이다. 650년, 육두품 집안에서 태어난 ‘선배’ 원효(元曉, 617~686)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고구려를 지날 때 첩자로 몰려 한동안 갇혔다가 풀려났다. 둘은 돌아오면서 평양 반룡산 연복사의 보덕화상에게 열반경을 배우기도 했다. 열반경은 석가모니의 열반에 대한 사건과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강조하는 경전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했다. 서쪽으로 향하는 뱃길이 열렸다. 두 번째 당나라 행은 육로 대신 바다를 택했다. 당항성(黨項城)으로 향했다. 지금의 경기도 화성이다. 긴 여행길에 지쳐 그들은 이슬과 바람만 피할 요량으로 한뎃잠을 청했다. 그렇게 이틀 밤을 지냈다. 첫날은 노독에 지쳐 정신이 없었고, 둘째 날에 일어나니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토감(土坎)을 한 곳에서, 그러니까 묏자리에 들어가기 전의 시체들이 즐비한 곳에서 몸을 누이고 있지 않았는가. 원효는 눈이 번쩍 뜨였다.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남으로써 갖가지 사물의 상이 생겨나고, 그 마음이 사라지면 함께 사물의 상도 사라진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 삼국유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 낸다는 깨달음이었다.
조선시대에 그린 의상대사 진영(왼쪽)과 원효대사 진영. 사진=범어사
원효는 발길을 돌렸다.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대오(大悟)했다는 이야기는 훗날 지어낸 것이라는 가능성이 짙다. 그를 뒷받침할만한 ‘믿을만한’ 문헌이 없다. 송의 덕홍이 『임간록(林間錄)』에서 '원효가 당게 건너가 해골에 고인물을 마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지만, 원효는 당에 간 적이 없기 이 이야기를 신뢰할 수 없는 까닭이다. 중국의 승려 찬녕이 지은『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시체와 더불어 잤다고 나올 뿐, 해골에 괸 물을 마셨다는 표현이 없다. 의상은 그런 원효를 보냈다. 혼자 배에 올랐다. 배에는 후일 문무왕이 되는 법민(法敏)이 타고 있었다. 중국 화엄종 제2조인 지엄에게 화엄(華嚴)을 배웠다. 화엄은 무한한 연관관계를 통해 이상적 불국토를 향한다는 가르침이다. 당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이 급히 의상을 불렀다. 당이 신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본국에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당 유학 9년만인 670년이었다.
마주보고 있는 의상봉·원효봉…두 고승이 올라 정진한 곳
원효는 전쟁통에 남편을 잃은 김춘추의 딸 요석공주를 만났다. 그 사이에서 아들 설총(薛聰)을 얻었다. 사창가를 드나들고 주막을 전전했다. 시장에서 거지들과 함께 바가지 두들기고 무애(無碍)춤을 추며 전쟁을 반대하기도 했다. 파계행을 하며 환속했다. 이는 당시의 형식적이고 권위적인 종교에 대한 비판이자 중생과 더불어 하려는 보살행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원효는 대승불교의 모든 종파를 아우른 팔종(八宗)의 조사로 일컬어졌다..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화엄경소(華嚴經疏)』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등 80여종 150여 권의 책을 썼다. 간결하고 유려한 문체로 불교 논리학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송고승전』은 그런 원효에 대해 ‘문단을 휘어잡았다’고 표현했다. 원효는 70세에 혈사(穴寺)에서 입적했다. 혈사는 현재의 경주 골굴사로 추정된다. 의상은 원효에 비해 과작이었다.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등을 펴냈다고 알려진다.
북한산 의상봉에 2015년 만들어진 나무계단. 계단 앞 바위턱에 양지꽃이 피었다. 김홍준 기자
의상봉의 비스듬한 북쪽 건너편, 원효봉이 있다. 나란히 뻗은 두 능선 첫 봉우리는 각각 의상과 원효라는 이름이 붙었다. 의상봉은 해발 502m, 원효봉은 505m에 그 꼭짓점을 만들었다. 의상봉은 결이 만만치 않다. 명성만 듣고 온 초심자라면 열에 아홉은 나가떨어진다. 까다로운 구간이 많다. 2000년 이전엔 그 까다로움을 진정시켜 줄 쇠줄이나 나무계단이 없었다. 의상처럼 매사를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으면 큰 탈이 날 것만 같다.
원효봉은 크게 어렵지 않다. 그런데, 뭉근하게 힘들다. 시구문에서 시작하는 계단은 육체와 정신의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 계단을 세어보다 어디까지 셌는지 잊어버리기 십상일 정도로 많은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원효가 떠오른다. 허허실실. 원효봉 정상은 평평하다. 뾰족한 봉(峰)이 아니라 너른 대(臺)가 아닐까 싶다. 일설에 의하면, 의상은 의상봉에서, 원효는 원효봉에서 마주보며 정진했다고 한다.
북한산 의상봉에서 바라본 용출봉. 의상능선은 불교 용어의 연속이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의상능선에서 바라본 백운대, 인수봉, 노적봉, 만경대. 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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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우리말인 미르, 미륵과 통해…의상능선은 불교와 관련
의상능선은 의상봉-용출봉-용혈봉-증취봉-나월봉-나한봉-문수봉으로 이어진다. 의상봉의 원래 이름은 미륵봉(彌勒峰)이었다.『송고승전』 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당나라의 선묘(善妙)는 자신이 사모하는 의상이 귀국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섭섭했다. 이미 의상을 극진히 모시던 터였다. 선묘는 용으로 변한다. 그리고 의상을 따라 신라로 향했다. 의상봉은 용출봉(龍出峰)으로 이어지고 그 다음이 용혈봉(龍穴峰)이다. 의상은 귀국 뒤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해 동쪽 바다로 향했다. 보살은 용을 보내고 후일 의상을 만났다. 의상이 낙산사를 세우게 된 일화다. 이 '선묘용'은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용의 우리말은 미르다. 미르는 곧 미래불인 미륵과 통한다고 한다. 미륵은 이상향인 불국토, 용화((龍華)세계를 지향한다. 그 미르가 1년 전 대한민국을 떠들석하게 만들기도 했다.
등산객들이 북한산 의상능선의 나월봉을 바라보고 있다. 김홍준 기자
증취봉(甑炊峰)은 증봉(甑峰)이라고도 불린다. 증(甑)은 시루다. 봉우리의 모양이 시루를 엎은 것 같다고 하는데, 시루는 본래 사찰의 대중공양을 위해 만들어졌다. 시루는 기와처럼 불사(佛事)의 한 방편이었다. 경남 양산 통도사 600여명의 승려가 시루에 떡과 밥을 쪄서 먹었다고 전해진다. 나월봉의 옛 이름은 환희봉(歡喜峰)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환희(歡喜)는 경주 황룡사 첫 주지였다. 황룡사는 다시 '용'과 연결된다. 환희는 또한 티베트 불교(라마교)에서 신성시하는, 코끼리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수호신을 말한다. 나월(蘿月)은 ‘잎 사이로 보이는 달’을 뜻한다. 나한(羅漢)은 일체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어 중생의 공양에 응할 만한 자격을 지닌 불교의 성자다. 나한봉과 문수봉 사이에 칠성봉(七星峯)이라는 곳이 있다. 비공식 이름이다. 칠성은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주재한다는 북두칠성의 신이다. 도교와 관련이 있지만 한국 불교에서 전각까지 만들며 기린다. 불교의 토착화, 대중화의 한 모습이다. 문수봉(文殊峰)은 문수보살의 그 문수요, 문수봉에서 이어지는 보현봉(普賢峰)은 보현보살의 그 보현이다. 사찰 대웅전에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석가모니를 좌우에서 모신다. 협시((脇侍)라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의상봉부터 문수봉·보현봉까지, 그 이름엔 모두 불교와 이런저런 인연이 스며 들어있다.
북한산 의상봉에서 바라본 용출봉. 오른쪽 비봉능선에 사모바위, 비봉이 보인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보현봉. 대남문을 사이에 두고 문수봉과 마주보고 있다. 김홍준 기자
의상능선은 원효봉을 마주보며 시작한다. 그리고 굴곡의 여정이 이어진다. 의상과 원효는 그 굴곡에도 지향점이 있었다. 대중화였다. 선택된 일부가 아닌 보편적 다수를 위한 것이었다. 의상은 세속의 대립과 갈등을 종교적 화해로 고치려고 했다.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고 제자를 받아들였다. 의상이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한 귀족종교를 내세웠다는 후세의 판단은 꺾어졌다. 원효도 화쟁(和諍)을 통해 종파의 대립을 막고 실천적 불교를 주장했다.
보편과 선택 사이, 우리는 지금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가. 의상봉 바람이 죽비처럼 어깨를 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