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가 죽는 장면을 지켜본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이후 삶은 화증(火症)으로 점철됐다.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봤다고 알려진 경종이 간질, 화증을 앓다 일찍 죽은 것과 비교하면 초인적인 자기절제를 발휘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조 즉위 원년 어의 강명길은 열과 기가 오르는 임금의 상기증(上氣症)을 치료하기 위해 아이들의 소변인 동변(童便)을 치료 약물로 권했다. “열을 내리고 기를 줄이는 데에는 동변만 한 것이 없으니 취침하실 때에 드시는 것이 매우 온당하겠습니다.” 정조는 심지어 감기에도 동변을 사용했다. “(그동안 감기 치료를 위해 많은 처방을 써 왔지만) 어제부터는 의원을 물리치고 스스로 터득한 처방을 써서 동변을 한 그릇 복용하고, 식후에 귤병차(橘餠茶)를 반 종지 들자 … 정신과 기운이 좀 강건해졌다.”
궁궐 내에서 약재로 썼던 동변은 사역원 봉상시 관상감에서 교육받는 12세 미만의 남자 아이(동변군)의 오줌만을 모아서 사용한다. 선공후사가 분명했던 정조는 자신에게 동변을 제공했던 동변군에게 시상까지 했다. 승정원일기에 이런 시상 기록이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 봐 동변의 효험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하면 불편하고 역겹지만 동변은 약재가 귀한 시절 장수건강법으로 각광받았다. 영조 때 우의정을 지낸 민진원은 “민간에서 동변이나 자기 오줌을 마시고 난 이후 장수하고 건강한 사람이 많다”고 했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은 신선의 약이라고 치켜세우면서 “가난한 사람의 값싼 보약”이라고 칭송했다. 왕이 되기까지 엄청난 콤플렉스와 스트레스에 시달린 영조도 “왕세자 시절 화증을 없애기 위해 내 소변을 먹었는데 입맛에 맞지 않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자신의 오줌을 먹는 자뇨요법은 대한제국 때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고종 황제 시절 영의정 이유원이 고종에게 동변을 추천하면서 자신도 저녁마다 먹고 있음을 강조한 기록을 보면 당시 조정 대신들 대부분이 동변을 먹거나 자뇨요법을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회주(輪回酒)’, ‘환원탕(還元湯)’이 약명이었던 걸 보면 오줌이 조선시대에는 회춘의 묘약이었던 셈.
야사에 따르면 우암 송시열이 83세까지 건강하게 산 이유가 평소 조롱박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며 동변을 받아 마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우암은 숙종이 내린 사약도 독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아 몇 사발을 먹고서야 숨을 거뒀다 한다. 사약의 주성분은 부자로 뜨거운 열성이 사람을 죽이는 독으로 작용하는 반면 동변은 찬 성질로 열을 내리는 힘이 강력하다. 평소 많이 먹어 둔 동변의 기운이 부자의 뜨거운 독성을 없애 준 탓인지도 모른다.
현대의학에선 소변에서 추출한 유로키나아제를 동맥경화 치료용 혈전용해제로 사용하는데 중국 명대의 약학서 본초강목도 타박상 치료에 동변을 써 특효를 거둔 사례가 나온다. 중국 명대 의사 설기가 마차 전복으로 부상을 입은 병사들에게 동변을 섞은 술을 먹여 깔끔하게 치료를 했다는 것. 어혈을 푸는 데(혈전용해)는 소변이 최고임을 몇 번씩 강조했다. 영조 또한 타박상 치료에 비싼 구보(狗寶) 대신 동변을 쓴 기록이 나온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동변으로 추석(秋石)이라는 약물을 만들기도 했다. 추석을 먹으면 양기가 북돋아 스태미나가 강화된다고 한다. 동변을 오줌통 속에 2, 3년 묵혔다 반복해 끓여서 사용한다는 것인데 여기에 교훈이 있는 듯하다. 욕망이란 늘 현실적인 것, 그런 세월을 두고 준비하느니 오늘 열심히 운동하며 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출처 :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