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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기생 산홍(山紅)과 을사오적 이지용

2018. 2. 7. 10:25

박종인의 땅의 歷史] 지조 있는 기생 산홍, 지조 없는 매국노를 심히 꾸짖더라

[110] 진주 기생 산홍(山紅)과 을사오적 이지용

논개 몸 던진 촉석루 절벽, 구한말 여러 인물 이름 새겨
을사늑약 반대한 한규설과 형 규직 이름
을사늑약 찬성한 매국노 이지용은 두 개나
한 귀퉁이에 보이는 이름 '山紅'
자기를 탐하는 이지용을 '역적이 감히!' 비난한 강단 있는 진주 기생
지조 있는 기생… 지조 없는 매국노… 절벽에 새겨진 어지러운 군상들

 

봉알자리와 진주

고려시대 왕실을 주름잡았던 진양 강씨 가문을 꼴사납게 보다가, 조정에서는 진주에 있는 강씨 문중 대봉산(大鳳山)을 비봉산(飛鳳山)이라 개명했다. 봉황이 날아갔다는 뜻이다. 돌아오지 않는 봉황을 위해 문중에서는 봉황이 알을 낳는 자리를 만들고 곳곳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성역시 된 봉황 알자리 이름은 봉알자리다. 오동나무는 봉황이 깃든다는 나무다. 남강변에는 대나무 숲을 조성해 봉황이 먹고 사는 대씨(竹實)를 거뒀다. 1971년 김도향은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잤더니 어이타 봉황은 꿈이었다 안 오시뇨'라고 노래했다.(투코리언스, '벽오동') 꿈이었는가. 봉황은 돌아왔는가.

해어화(解語花)

1907년 관기(官妓) 제도가 폐지됐다. 수많은 황진이와 춘향이가 실업자가 되었다. 삶터를 잃은 기생들이 조합을 만들었다. 나라가 사라진 뒤 조합은 일본제도인 권번(券番)으로 전환됐다. 악가무(樂歌舞), 악기와 노래와 춤을 하던 예기(藝妓)와 몸을 파는 창기(娼妓)가 한꺼번에 총독부 관리하에 들어갔다. 예기들은 억울했지만, 할 수 없었다. 총독부 경무국 통계에 따르면 1925년 7월 현재 조선 각지 기생은 7651명인데 일본인 기생이 4891명, 조선인이 3413명이었다. 본적이 경남인 기생이 1139명으로 조선인의 3분의 1이었다. 그다음이 경기도(626명), 평안남도(469명)였다.(김재영, '일제 강점기 형평운동의 지역적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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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 촉석루는 임진왜란 이래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역사를 품고 있다. 일제강점기 촉석루에서 노닥대는 남정네들을 보고 진주 기생 산홍(山紅)은 이렇게 읊었다. ‘부끄러운 인생들이 너절하게도 논다’. /박종인 기자

남자들은 그 기생을 꽃이라고 불렀다. 꽃 중에서도 말귀를 알아듣는 꽃, 해어화(解語花)라고 불렀다. 당나라 현종이 자기 첩 양귀비를 그리 부른 이래, 남정네들은 기생을 그저 꽃이라 부르고 말귀가 멀거나 맘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꺾어버리곤 했다. 그런데.

진주 기생 산홍

북에는 평양, 남에는 진주 기생이라 했다. 그 진주 기생은 달랐다.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독립선언문이 선포됐다. 18일 뒤 진주기생조합 조합원 50명이 태극기를 들고 경남도청에서 촉석루로 행진했다. 여섯 명이 체포돼 고생을 했다. 전 경남일보 논설위원 장일영이 말했다. "황소 목은 꺾어도 진주 기생은 못 꺾는다고 했다. 그만큼 강단이 있다는 거다."

강단은 다른 말로 절개(節槪)와 지조(志操)다. 오동나무가 아니면 둥지를 틀지 않고 대씨가 아니면 먹지 않는, 봉황 같은 지조다.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 승전 후 일본군이 촉석루에서 자축 파티를 열었다. 그때 논개가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라는 장교를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양반집 규수라는 후대 평가가 있지만, 진주성에는 그녀를 기리는 의기사(義妓祠)가 있다. 다산 정약용, 매천 황현 같은 사내들이 의기사에 들러서 글을 남겼다. 정약용이 남긴 '의기사기(義妓祠記)' 현판에는 '정조 4년 경자'라 적혀 있다. '정조'라는 묘호는 왕이 죽고 붙는 이름인데, 정약용은 어찌 임금 생전에 묘호를 알았을까. 후대에 제작하려면 똑바로 만들어야지, 우습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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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아래 절벽에는 구한말 군상(群像)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대표적인 이름은 이렇다. ① 山紅(산홍) : 이지용을 비난한 기생 산홍 ② 韓圭稷(한규직) 韓圭卨(한규설) : 우국지사 한규설 형제 ③ 李垠鎔(이은용) 李址鎔(이지용) : 을사오적 이은용(이지용) ④ 一帶長江千秋義烈(일대장강천추의열) : 김시민과 논개의 의열을 기린 글 ⑤ 논개가 투신한 바위 의암(義巖)

강물 쪽 처마 밑에는 이런 시가 걸려 있다. '義妓祠感吟'(의기사감음·〈의기사에서 느낀 바를 읊다〉) 구한말 혹은 나라가 망한 뒤 촉석루에서 낮술에 해롱대는 명망가들을 조롱하는 시다. 맨 끝에 작가 이름이 나온다. '本州妓 山紅(진주 기생 산홍)'. 강단과 절개가 있는 여자, 진주 기생 산홍이다.

고종 어진 화가 채용신이 그렸다고 전하는 여덟 폭 팔도미인도에는 미녀 여덟 명이 등장한다. 주로 기생들이다. 의기(義妓)들이다. 채용신은 구한말 우국지사 초상화를 여럿 그렸다. 경상도 미인도에는 진주 관기 산홍상(山紅像)이라 적혀 있다. 산홍은 누구인가. 채용신이 모델로 삼았으니 의로운 인간임이 분명하고, 경상도 대표 미인이니 남자들 눈에 용모가 아름다웠음이 분명하다.

매국노 이지용

1899년 경상남도 관찰사에 부임한 이은용(李垠鎔)이라는 자가 그 미녀 산홍에게 눈이 꽂혔다. 이은용은 또 누구인가. 이듬해 고종의 일곱째 아들 은(垠)이 영친왕에 책봉되자 같은 글자를 피하기 위해 개명을 한, 만고 역적 친일파 이지용(李址鎔)이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 정동 중명전에서 고종에게 을사조약을 강요할 때, 내부대신 이지용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학부대신 이완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내부대신 이지용을 을사오적이라고 부른다. 그때 결사반대를 외쳤던 참정대신 한규설은 옆방에 감금됐다가 파직됐다. 한규설의 사위는 군부대신 이근택의 아들이었다. 을사늑약 그날, 이근택이 귀가해 "다행히 죽음을 면했다"고 했다. 한규설 딸을 따라갔던 여종이 식칼을 들고 나와 "내 칼이 약하여 너를 만 동강이로 베지 못해 한스럽다"며 한규설 집으로 달아났다.(황현, 매천야록, 1905, 〈이근택 여비의 질타〉)

매국노와 의기의 만남

그 이지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뒤, 절세 미녀 산홍을 첩으로 삼고자 했다. 아마 경남관찰사 시절 인연을 맺지 않았을까. "진주 기생 산홍은 아름답고 서예도 잘하였다. 이지용이 첩을 삼으려고 하자 산홍이 말했다. '내 비록 천한 기생이나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는가.' 이에 이지용이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매천야록, 1906, 〈진주 기생 산홍의 의기〉) 그 기록 아래에는 이런 시가 덧붙어 있다. '세상 사람들 앞다퉈 매국인에게 달려가 노비처럼 굽신거린다. 그대들 집에 금과 옥이 높이 쌓여도 산홍에게서는 한 점 봄도 사기 어렵다(難買山紅一點春).'

동서대 영상미디어학부 하강진 교수에 따르면, 이후 이지용은 대망신을 당한다. 그해 11월 22일 '대한매일신보'에 기사가 실렸다. '기생이 내부대신 이지용씨를 매국노라 비난하며 첩 되기를 거부하자 기생 서방이 아내를 구타했다'는 것이다. 다음 날 이 신문 속보는 '애국하는 천심(天心)'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소위 '정정 기사'가 게재됐다. 제목은 '기녀 남편이 변명하다(妓夫辨明)'다. "기생 남편 최기호가 변명하되, '이지용은 매국 수괴인 고로 산홍이가 거절하여 백정과 살지언정 매국노와 같이 살리오 한지라, 내가 금수가 아니면 어찌 기생을 난타할 리가 있으리까' 하며 자기는 때린 적이 없다고 하더라." 이지용을 매국 수괴라 한 번 더 보도하고, 산홍을 때린 이가 이지용임을 재차 알린 기사였다. 일주일 뒤 이지용이 일본으로 가는 특사로 임명되자 대한매일신보는 이렇게 한마디 했다. "일본에 산홍이 같은 기생이 또 있을까 무섭소"(대한매일신보 1906년 11월 29일 자). 끝이 아니었다.

1908년 2월 15일 '황성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미인일소경천금(美人一笑輕千金), 미녀가 천금을 웃어넘기다'. "중추원 고문 이지용씨가 한 번 웃으면 백 가지 애교가 넘치는 명기 산홍에 푹 빠져 1600환짜리 보석 반지를 주고 미친 듯이 취하였더라."(이상 하강진, 2013, '진주 남강 절벽의 바위 글씨로 읽는 근대 인물의 사회문화사' 재인용)

의인과 모리배의 최후

구한말 위정척사파 거두 송병선의 제자 양회갑(梁會甲)이 남긴 시가 있다. '妓山紅數罪賣國賊 不許寢自死(기생 산홍, 매국노를 거듭 탓하며 동침을 거부하다가 자결하다)' '(전략)/산홍이 한 조각 상여 타고 길을 떠나니(山紅一片柳車路)/(중략)/가여워라 지금도 살아 있는 저 역적(可憐當日生諸賊)/개가 주인 뜻 알아 남긴 음식도 안 먹네(狗不食餘識主情)' 그런 그녀였기에, 산홍은 '부끄러운 인생들 너절하게 논다'고 촉석루에서 읊은 것이다.

이지용은 경술국치 후 총독부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고 "30만1800원의 빚을 지면서"(동아일보 1922년 7월 22일), "남부럽지 않게 한참 첩놀이를 잘 하고"(개벽, 1924, 〈형형색색의 경성 첩 마굴 가경가증할 유산급의 행태〉) 1928년 죽었다. 쌀값을 기준으로 1922년 30만원은 지금 20억원이 넘는다.(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산홍이 나고 죽은 때는 알 수 없다.

촉석루 절벽에 새긴 뜻은

촉석루 아래를 본다. 논개와 진주성 전투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의 의기를 기리는 '一帶長江千秋義烈(일대장강천추의열)' 여덟 자가 장엄하다. 그 왼쪽 끝에 전 경남우병사요 을사늑약을 반대한 참정대신 한규설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바로 오른쪽에 전 경남관찰사요 매국노 이은용 이름이 확연하다. 그가 이름을 지용으로 고치고 잘나가던 어느 시점, 진주 땅 어느 간신배가 그 오른쪽 귀퉁이에 '이지용'이라고 또 새겨놓았다. 그 반대편 모퉁이에는 누군가가 山紅 이름 두 자를 새겨놓았다. 오로지 지조로 살던 이들과 다 있되 지조가 없는 자. 어지럽다.

 



[출처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