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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과 영락제가 여진족 추장 쟁탈전을 벌인 까닭은?

2018. 3. 10. 10:32

태종과 영락제가 여진족 추장 쟁탈전을 벌인 까닭은?

유성운의 역사정치⑭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  
조선 전기의 외교관계는 이 여진족 추장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명나라 영락제와 조선 태종은 동맹가첩목아를 포섭하기 위해 경쟁했고, 그는 이런 환경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습니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열세였던 동맹가첩목아 세력은 명과 조선을 상대로 적절한 협력과 대결 전략을 번갈아 구사했고, 남만주 일대에서 독자적 세력화에도 성공했습니다.  
동맹가첩목아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으며, 조선과 명은 왜 일개 여진족 추장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일까요.  
 

“오도리(吾都里) 상만호(上萬戶)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 등 5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태조실록』 4년 9월 8일) 

『조선왕조실록』은 동맹가첩목아와 조선의 첫 접촉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동(童)’은 성(性)이고, ‘맹가(猛哥)’는 ‘몽케’의 차음입니다.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4대칸인 원 헌종도 이름이 몽케였기에 몽케 칸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첩목아(帖木兒)’도 기마 민족들이 즐겨 쓰는 ‘티무르’라는 이름인데 철(鐵)을 의미합니다.  
만주족의 역사를 다룬 『만주실록(滿洲實錄)』에서 건국 시조 누르하치의 6대조 조상으로 기록된 먼터무(孟特穆)와 동일인이기도 합니다.   
조선 건국을 다룬 SBS 드라마 '대풍수'에서 이성계(지진희 분). 함경북도 경흥 출신인 이성계는 두만강 일대 여진족과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진제공 SBS]

조선 건국을 다룬 SBS 드라마 '대풍수'에서 이성계(지진희 분). 함경북도 경흥 출신인 이성계는 두만강 일대 여진족과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진제공 SBS]

만호(萬戶)는 여말선초 시기의 관직입니다. 조선은 여진족 추장을 만호로 우호적인 세력으로 만들곤 했습니다. 동맹가첩목아가 다스렸던 오도리는 함경북도 회령(會寧)으로 추정되는데, 동북면으로 불린 두만강 일대가 정치적 기반이었던 이성계는 이 지역 여진족들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여진족 추장으로 훗날 조선에 귀화한 이지란(만주명 퉁지란)이 대표적이죠.   
 
이런 태조가 죽은 뒤 조선과 여진의 관계는 차츰 악화되면서 변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태종이 즉위한 뒤 선조 대까지 여진족이 북쪽 국경을 침입한 횟수는 131회에 달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일부는 우호적인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맹가첩목아였습니다. 이같은 우호적 여진 추장을 포섭해 변경을 튼튼히 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태종의 기본 구상이었습니다.
 후금(청)을 건국한 누르하치. 청나라의 기원을 수록한 『만주실록(滿洲實錄)』에 따르면 누르하치는 조선의 만호였던 동맹가첩목아의 6대 후손이다. [중앙포토]

후금(청)을 건국한 누르하치. 청나라의 기원을 수록한 『만주실록(滿洲實錄)』에 따르면 누르하치는 조선의 만호였던 동맹가첩목아의 6대 후손이다. [중앙포토]

 
요동을 둘러싼 명-조선의 신경전
1400년 즉위한 태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야심만만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정도전 숙청 등 2차례 ‘왕자의 난’을 주도했던 그는 왕위에 오르자 압록강 및 두만강 유역으로 확장을 시도합니다. 특히 이성계 집안이 일어섰기 때문에 조선 왕실의 발상지(祖宗舊地)라고 여겨졌던 두만강 일대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땅이었습니다.
1872년 편찬된 함경도 지도에 등장하는 경흥. 서쪽이 위고, 동쪽이 아래다. 이성계가 군사력을 키웠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발상지로 여겨졌다. [자료 서울대 규장각]

1872년 편찬된 함경도 지도에 등장하는 경흥. 서쪽이 위고, 동쪽이 아래다. 이성계가 군사력을 키웠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발상지로 여겨졌다. [자료 서울대 규장각]

하지만 같은 시기에 명나라에도 또한 만만치 않은 군주가 나타납니다.  

1402년 즉위한 영락제입니다. 
동아프리카까지 진출했던 ‘정화의 대원정’으로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그는 명-조선 사이에 ‘공백지’처럼 존재했던 만주를 세력권으로 편입하려 했습니다. 왕자 시절 연왕(燕王)으로서 북쪽 변방의 수비를 맡았던 그는 요동 사정에도 밝은 편이었습니다.
명나라의 판도를 확장한 영락제.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주체는 연왕에 봉해졌으나 '정란의 변'을 일으켜 조카 건문제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명나라의 판도를 확장한 영락제.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주체는 연왕에 봉해졌으나 '정란의 변'을 일으켜 조카 건문제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영락제는 조선이 훗날 4군 6진을 구축할 압록강-두만강 라인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것도 달가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북쪽의 몽골(북원)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상황에서 만주 남쪽인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까지 직접 챙기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정화의 대원정. 7차례에 걸친 해상 (조공)무역로 개척을 통해 명은 세력을 동아프리카 일대까지 과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막대한 비용 때문에 중단했다. [중앙포토]

정화의 대원정. 7차례에 걸친 해상 (조공)무역로 개척을 통해 명은 세력을 동아프리카 일대까지 과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막대한 비용 때문에 중단했다. [중앙포토]

이 때문에 명나라의 기본 입장은 현상유지였습니다.  
굳이 만주 일대를 영토로 편입하고 군사력과 행정력 등 '비용'을 들여 조선과 신경전을 벌이기보다는, 여진 세력의 지도층을 복속시키고 이를 통해 조선을 견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하려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종은 여진족 각 세력, 특히 조선과 가까웠던 세력을 집중적으로 공략합니다. 동맹가첩목아도 그런 과정에서 ‘선택’됐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동맹가첩목아를 지켜라"
태조 이래 그동안 조선과 관계를 맺었던 동맹가첩목아는 영락제 이후 명나라에 입조하라는 권유를 수차례 받습니다. 반면 조선은 이를 막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명의 관직을 받게 되면 특수적 종속 관계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조선 건국을 다룬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한 장면. 왕위에 오르기 전 이방원(오른쪽)과 훗날 영락제로 즉위하는 주체(왼쪽)

조선 건국을 다룬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한 장면. 왕위에 오르기 전 이방원(오른쪽)과 훗날 영락제로 즉위하는 주체(왼쪽)

“명 사신이 오는 것은 오로지 동맹가첩목아를 회유하려는 것이니 이것을 도모하라”(『태종실록』 5년 3월)
태종은 동맹가첩목아에게 사람을 보내 위로하고 물품을 하사하는가 하면 관직을 올려주기도 합니다. 이에 영락제는 사신을 통해 “짐이 왜 조선과 영토를 다투겠냐”며 짜증섞인 추궁을 하기도 했습니다.
 
태종의 이런 노력은 일부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동맹가첩목아는 결국 ‘현실’을 선택해 명나라에 입조하고 거주지역도 두만강 일대보다 명나라에 더 가까운 압록강 일대로 옮깁니다. 
이런 과정에서 조선과 관계를 단절하게 된 동맹가첩목아는 영락제의 북방 원정에도 참전하는 등 충성심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이를 계기로 타타르족의 보복이 다가오자 다시 두만강 일대로 도망칩니다. 세종 11년의 일입니다.
 
세종은 이런 동맹가첩목아 세력을 극진하게 환영하는 한편 특별 대우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범찰(동맹가첩목아의 아들) 등이 청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들어주었고, 조회하러 오는 자가 있으면 사관을 제공하고 양식을 주어 우대하였다… 차례를 뛰어넘어 관직을 제수하고 여러 물품을 하사했으며, 심지어 농사짓는 것, 사냥하는 것, 짐승 기르는 것까지도 그들의 편리한 대로 허가하여 여러모로 무휼 하였다” (『세종실록』 22년 7월)
조선 세종 시기 만주일대 분포한 여진족 세력. [자료 박정민 『조선 세종대 여진인 통교체제의 정비 』]

조선 세종 시기 만주일대 분포한 여진족 세력. [자료 박정민 『조선 세종대 여진인 통교체제의 정비 』]

과거 학계에선 여진 세력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조선-명 사이에 샌드위치로 끼어있던 여진 세력의 비애 정도로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만주족의 역사와 통치 스타일을 재평가하는 '신청사(新淸史)' 바람이 일면서 분위기도 바뀌었습니다. 동맹가첩목아 세력이 명과 조선 사이에서 적극적인 양다리 외교를 구사하며 실리를 취했다는 시각도 많아졌습니다.  
당시 경제력이 지극히 빈곤했던 여진 세력으로서는 명과 조선 중 양자택일을 하기보다, 이중 외교를 통해 양측으로부터 생필품 등의 물자를 많이 획득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고, 대체로 성과를 거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동맹가첩목아의 ‘생존 외교’는 조선의 영토 확장에도 일정 정도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태종대부터 추진된 6진 개척은 아들 세종이 즉위하고도 20여년이 지난 뒤 동맹가첩목아가 사망한 뒤에야 이뤄집니다.  
세종 시대에 개척한 4군 6진. 하지만 이 지역은 강에 3면이 포위된 지형이기 때문에 방어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4군 지역은 세조 대에 폐지됐다. [중앙포토]

세종 시대에 개척한 4군 6진. 하지만 이 지역은 강에 3면이 포위된 지형이기 때문에 방어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4군 지역은 세조 대에 폐지됐다. [중앙포토]

이들은 또한 압록강 일대에서 계속 세력을 유지합니다. 
명나라와 조선은 압록강 일대의 안정을 위해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하고 나중에는 건주좌위(建州左衛)와 건주우위(建州右衛)로 나누는데, 이곳은 모두 동맹가첩목아의 동생인 범찰(凡察)과 아들인 동창(童倉)이 각각 도독으로 오르게 됩니다.  
양국의 입장에서 그나마 혼란스러운 이 지역을 통솔할 수 있는 것은 동맹가첩목아 집안뿐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훗날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도 이런 배경 속에서 활동 공간을 얻습니다.
 
중국의 '요동' 트라우마
“중원은 우리를 지키지 못하면 요동이 반드시 먼저 흔들려 천하의 형세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고군분투했던 영의정 유성룡은 선조에게 명나라가 파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역대 중국 왕조는 압록강 동쪽인 요동(遼東)이 흔들리면 중원에도 위협이 된다고 봤고, 이 지역 경계에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이 고려에 "원을 계승했으니 철령 이북의 땅도 우리 것"이라며 땅을 가져가려 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은 압록강 일대에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명나라를 설득하고, 필요시엔 기만하기도 하는 외교술을 발휘해야 했습니다. 
12세기 동북아 판도. 요동에서 일어난 여진족은 금나라를 건국한 뒤 거란(요)를 물리치고 중원을 정복했다. 요동에 대한 방비가 허술해지면 중원 왕조는 침략을 당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중앙포토]

12세기 동북아 판도. 요동에서 일어난 여진족은 금나라를 건국한 뒤 거란(요)를 물리치고 중원을 정복했다. 요동에 대한 방비가 허술해지면 중원 왕조는 침략을 당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중앙포토]

명에서 동맹가첩목아를 입조시키려 하자 태종이 명나라 몰래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협박하며 동맹가첩목아가 가지 못하게 막았던 것이 대표적입니다.
또, 여진 정벌을 계획할 때면 여진족의 침입으로 조선-명 국경지대가 혼란에 빠졌다는 점을 명나라 측에 강조하곤 했습니다. 
특히 4군 6진을 개척했던 세종은 명나라의 동의를 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반대로 중국이 먼저 연합 군사작전을 요청한 적도 했습니다. 광해군 시기에 있었던 사르후 전투(명-조선 vs 후금)가 대표적입니다.   
 『광해군일기』. 광해군은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여 도원수 강홍립이 지휘하는 1만3000명의 병사를 보냈으나 명-조선 연합군은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의 군대에게 패배했다. [중앙포토]

『광해군일기』. 광해군은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여 도원수 강홍립이 지휘하는 1만3000명의 병사를 보냈으나 명-조선 연합군은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의 군대에게 패배했다. [중앙포토]

9일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의 회담에 긍정적 신호를 보내면서 북한을 둘러싼 외교적 움직임이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예상보다 빠른 속도”라는 반응을 보이며, 북-미 회담의 결과가 한반도 비핵화로 이어지기를 손꼽아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북특사단 방북결과를 설명을 위해 방미중인 정의용 안보실장이 8일 오후 (현지시간) 백악관 트럼트 대통령과 면담을 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대북특사단 방북결과를 설명을 위해 방미중인 정의용 안보실장이 8일 오후 (현지시간) 백악관 트럼트 대통령과 면담을 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하지만 역사가 보여주는 동북아 정세의 핵심 상수 중 하나는 중국입니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대북 제재를 벌일 때 언제나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던 이유입니다. 
현재 권력을 잡고 있는 시진핑 중국 주석은 여러모로 명나라 영락제와 비교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가 야심 차게 추진하는 ‘일대일로’ 구상은 ‘정화의 대원정’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사실 여부를 떠나 확장 정책을 펴는 것만큼은 동일합니다.   
지난 3일 중국의 연례 최대 정계 행사인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앞줄)이 개막식에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3일 중국의 연례 최대 정계 행사인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앞줄)이 개막식에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 시진핑은 한반도에 대해 주판알을 튕기며 어떤 선택을 준비하고 있을까요. 600년 전 태종 시기에 동맹가첩목아를 입조시켰던 조치를 떠올릴까요, 아니면 세종시기에 조선 주도로 압록강·두만강 일대를 안정시켰던 일을 떠올릴까요.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