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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⑭
조선 전기의 외교관계는 이 여진족 추장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명나라 영락제와 조선 태종은 동맹가첩목아를 포섭하기 위해 경쟁했고, 그는 이런 환경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습니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열세였던 동맹가첩목아 세력은 명과 조선을 상대로 적절한 협력과 대결 전략을 번갈아 구사했고, 남만주 일대에서 독자적 세력화에도 성공했습니다.
동맹가첩목아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으며, 조선과 명은 왜 일개 여진족 추장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일까요.
“오도리(吾都里) 상만호(上萬戶)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 등 5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태조실록』 4년 9월 8일)
‘동(童)’은 성(性)이고, ‘맹가(猛哥)’는 ‘몽케’의 차음입니다.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4대칸인 원 헌종도 이름이 몽케였기에 몽케 칸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첩목아(帖木兒)’도 기마 민족들이 즐겨 쓰는 ‘티무르’라는 이름인데 철(鐵)을 의미합니다.
만주족의 역사를 다룬 『만주실록(滿洲實錄)』에서 건국 시조 누르하치의 6대조 조상으로 기록된 먼터무(孟特穆)와 동일인이기도 합니다.
이런 태조가 죽은 뒤 조선과 여진의 관계는 차츰 악화되면서 변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태종이 즉위한 뒤 선조 대까지 여진족이 북쪽 국경을 침입한 횟수는 131회에 달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일부는 우호적인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맹가첩목아였습니다. 이같은 우호적 여진 추장을 포섭해 변경을 튼튼히 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태종의 기본 구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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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을 둘러싼 명-조선의 신경전
정도전 숙청 등 2차례 ‘왕자의 난’을 주도했던 그는 왕위에 오르자 압록강 및 두만강 유역으로 확장을 시도합니다. 특히 이성계 집안이 일어섰기 때문에 조선 왕실의 발상지(祖宗舊地)라고 여겨졌던 두만강 일대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땅이었습니다.
1402년 즉위한 영락제입니다.
동아프리카까지 진출했던 ‘정화의 대원정’으로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그는 명-조선 사이에 ‘공백지’처럼 존재했던 만주를 세력권으로 편입하려 했습니다. 왕자 시절 연왕(燕王)으로서 북쪽 변방의 수비를 맡았던 그는 요동 사정에도 밝은 편이었습니다.
굳이 만주 일대를 영토로 편입하고 군사력과 행정력 등 '비용'을 들여 조선과 신경전을 벌이기보다는, 여진 세력의 지도층을 복속시키고 이를 통해 조선을 견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하려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종은 여진족 각 세력, 특히 조선과 가까웠던 세력을 집중적으로 공략합니다. 동맹가첩목아도 그런 과정에서 ‘선택’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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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가첩목아를 지켜라"
태종은 동맹가첩목아에게 사람을 보내 위로하고 물품을 하사하는가 하면 관직을 올려주기도 합니다. 이에 영락제는 사신을 통해 “짐이 왜 조선과 영토를 다투겠냐”며 짜증섞인 추궁을 하기도 했습니다.
태종의 이런 노력은 일부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동맹가첩목아는 결국 ‘현실’을 선택해 명나라에 입조하고 거주지역도 두만강 일대보다 명나라에 더 가까운 압록강 일대로 옮깁니다.
이런 과정에서 조선과 관계를 단절하게 된 동맹가첩목아는 영락제의 북방 원정에도 참전하는 등 충성심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이를 계기로 타타르족의 보복이 다가오자 다시 두만강 일대로 도망칩니다. 세종 11년의 일입니다.
세종은 이런 동맹가첩목아 세력을 극진하게 환영하는 한편 특별 대우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범찰(동맹가첩목아의 아들) 등이 청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들어주었고, 조회하러 오는 자가 있으면 사관을 제공하고 양식을 주어 우대하였다… 차례를 뛰어넘어 관직을 제수하고 여러 물품을 하사했으며, 심지어 농사짓는 것, 사냥하는 것, 짐승 기르는 것까지도 그들의 편리한 대로 허가하여 여러모로 무휼 하였다” (『세종실록』 22년 7월)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만주족의 역사와 통치 스타일을 재평가하는 '신청사(新淸史)' 바람이 일면서 분위기도 바뀌었습니다. 동맹가첩목아 세력이 명과 조선 사이에서 적극적인 양다리 외교를 구사하며 실리를 취했다는 시각도 많아졌습니다.
당시 경제력이 지극히 빈곤했던 여진 세력으로서는 명과 조선 중 양자택일을 하기보다, 이중 외교를 통해 양측으로부터 생필품 등의 물자를 많이 획득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고, 대체로 성과를 거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동맹가첩목아의 ‘생존 외교’는 조선의 영토 확장에도 일정 정도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태종대부터 추진된 6진 개척은 아들 세종이 즉위하고도 20여년이 지난 뒤 동맹가첩목아가 사망한 뒤에야 이뤄집니다.
명나라와 조선은 압록강 일대의 안정을 위해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하고 나중에는 건주좌위(建州左衛)와 건주우위(建州右衛)로 나누는데, 이곳은 모두 동맹가첩목아의 동생인 범찰(凡察)과 아들인 동창(童倉)이 각각 도독으로 오르게 됩니다.
양국의 입장에서 그나마 혼란스러운 이 지역을 통솔할 수 있는 것은 동맹가첩목아 집안뿐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훗날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도 이런 배경 속에서 활동 공간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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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요동' 트라우마
임진왜란 때 고군분투했던 영의정 유성룡은 선조에게 명나라가 파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역대 중국 왕조는 압록강 동쪽인 요동(遼東)이 흔들리면 중원에도 위협이 된다고 봤고, 이 지역 경계에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이 고려에 "원을 계승했으니 철령 이북의 땅도 우리 것"이라며 땅을 가져가려 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은 압록강 일대에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명나라를 설득하고, 필요시엔 기만하기도 하는 외교술을 발휘해야 했습니다.
또, 여진 정벌을 계획할 때면 여진족의 침입으로 조선-명 국경지대가 혼란에 빠졌다는 점을 명나라 측에 강조하곤 했습니다.
특히 4군 6진을 개척했던 세종은 명나라의 동의를 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반대로 중국이 먼저 연합 군사작전을 요청한 적도 했습니다. 광해군 시기에 있었던 사르후 전투(명-조선 vs 후금)가 대표적입니다.
현재 권력을 잡고 있는 시진핑 중국 주석은 여러모로 명나라 영락제와 비교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가 야심 차게 추진하는 ‘일대일로’ 구상은 ‘정화의 대원정’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사실 여부를 떠나 확장 정책을 펴는 것만큼은 동일합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