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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2> 을미왜변과 대한제국
명성황후 칼로 찌른 인물 드러나
히로시마 법정의 낭인들은 들러리
日 정부와 軍 수뇌 미야모토 관리
대만 위험지대에 파견 49세로 전사
軍籍엔 기록, 야스쿠니신사엔 누락
일본 군부의 군사작전으로 진행
우치다 영사 비밀 보고서에 담겨
시효 없는 범죄 일본 정부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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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프레임 극복 출발점은 대한제국
1895년 10월 8일 새벽, 조선의 왕비가 자신의 왕궁에서 ‘소시(壯士)’라는 일본 낭인들을 들러리로 동원한 일본군의 군사작전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고 불태워졌다. 세계가 놀란 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우리는 그동안 ‘을미사변’이란 중립적 용어로 얼버무려 왔다. 명성황후를 실제 누가 칼로 찔렀는지 그 진상이 제대로 밝혀진 것도 알고 보면 최근의 일이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2000년 『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을 펴내며 대한제국 다시 보기의 물꼬를 텄다. 곧이어 2001년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효형출판)를 통해 대한제국과 명성황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펼쳐 보이며 을미왜변이 일제의 만행이었음을 확인시켰다. 2009년에는 재일동포 2세 역사학자 김문자(金文子)씨가 펴낸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태학사·2011년 번역)에서 일본 군부 자료 분석을 통해 을미왜변이 일왕 직속의 최고통수기관인 대본영에 의해 저질러진 국가범죄임을 밝혀냈다. ‘소시’라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추정됐던 그동안의 통설을 뒤집은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명성황후에게 칼을 댄 자가 누구인지까지 밝혀졌는데 그것은 강범석 히로시마(廣島)시립대학 명예교수의 『왕후모살』(솔·2010), 이종각 동양대 교수가 펴낸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메디치미디어·2015) 두 책을 통해서다. 왕후 시해라는 중차대한 일을 깡패 같은 낭인이 저질렀다는 점에 강범석은 의문을 제기하며 연구를 시작했다.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서 다뤄진 을미왜변 관련 비밀 전문 등을 분석하며 경성수비대(후비보병 독립 제18대대) 대장 직속의 육군 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여기에 더해 이종각은 우치다 사다쓰치 주한영사의 보고서를 분석해 을미왜변이 일본 군부의 군사작전으로 진행됐으며 범인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였음을 다시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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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고금 미증유의 흉악 저지른 것”
우치다 영사는 왕비 시해 당일 오후 곧바로 하라 다카시 일본 외무차관에게 사건개요를 적은 극비 사신을 보내며 읽고 나서 불태울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하라는 이 사신을 자신의 생가 창고에 갖다 두었고 이것이 90년 뒤 다른 문서들과 함께 발견돼 1984년 『하라 다카시 관계 문서』로 묶여 나와 빛을 보게 되었다. 이 극비 사신 속에 우치다는 “(왕비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 소위”라고 적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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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20년간 화근이었던 왕비 제거”
미야모토를 철저히 은닉해 오던 일본 정부는 1년 9개월 뒤인 1897년 9월 27일 그의 병과를 헌병 소위로 바꿔 대만에 파견했다. 토착민의 항쟁을 진압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임무였다. 그는 대만에 투입된 지 2개월23일 만에(그해 12월 20일) 전사했다. 미야모토 소위가 49세로 전사한 사실은 군적에 기록돼 있지만, 야스쿠니 신사의 246만6000명의 전사자 명부에는 누락돼 있다. 일본 군부와 정부가 미야모토의 입을 염려해 위험지대로 파견했고 또 전사 후에도 이웃 나라의 왕비 시해자임이 밝혀져 외교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미리 계산한 교묘한 은폐로 보인다.
왕비 살해 후 미우라 공사가 국왕을 알현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에 들어와 범행 현장을 둘러보았고 시신 소각 명령도 내렸다(한영우 지음,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 57~61쪽 참조). 미우라는 범행 6일 뒤 내각총리 이토 히로부미에게 직접 보낸 공식 보고서(10월 14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세력을 유지하고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렇게 하게 된 바, 그 전후 사정을 잘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 요컨대 이번 사건은 당국(當國:조선) 20년 이래의 화근을 단절하여 정부의 기초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단초를 열 것이라고 본관은 확신하는 바, 비록 그 행동이 좀 과격한 바 있었다고 해도 외교상의 곤란만을 극복한다면 우리의 대한(對韓) 정략은 이로써 확립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市川正明 편, 『日韓外交史料(5)』,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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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이토 사살 후 “황후 살해한 죄”
당시 일본 총리가 이토 히로부미였다는 점도 놓쳐선 안 된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한 후 공개적으로 밝힌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 가운데 제1의 항목이 “황후를 살해한 죄”였다. 요즘도 우리 사회에 ‘황후는 무슨 황후냐’면서 명성황후의 존재 자체를 폄하하는 경향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 같은 시각으로 본다면 안중근 의사가 왜 이토를 사살한 첫째 이유로 명성황후 시해 문제를 거론했는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토가 지휘하는 일본 정부와 김홍집 중심의 친일내각은 사활을 걸고 을미왜변의 은폐에 나섰다. 미우라와 대원군이 공모했으며, 왕비와 대원군 간의 집안싸움으로 사건을 조작했다. 대원군이 일본 낭인들에 의해 경복궁에 끌려나왔음은 친일파 윤치호가 쓴 『윤치호 일기』(1895년 10월 29일자)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김홍집 친일내각은 이 사건을 훈련대와 순검(巡檢·경찰)의 충돌로 변조하고 왕비가 무사한 것으로 꾸며 발표했다. 하지만 황제를 보호하는 시위대의 미국인 교관 다이 장군,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 등 외국인 목격자와 각국 공사들의 폭로로 사건을 은폐하고 호도하려는 친일내각의 시도는 무산됐다. 그러자 일본과 친일내각은 방향을 틀어 을미왜변이 일본 정부 모르게 미우라가 단독으로 대원군과 공모하여 낭인들을 동원해 저지른 사건으로 꾸며 댔다. 친일적 시각에서 사건들을 기술한 정교의 『대한계년사』는 이 같은 일제의 연막과 홍보를 되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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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대원군을 황후 살해범으로 몰기도
일본 정부와 친일 김홍집 내각은 을미왜변에 왜군이 개입한 사실이 발각되고 나서도 ‘한성신보’를 앞세워 왕비가 궁을 빠져나간 것 같다며 왕비 시해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했다. 이런 정보 조작 때문에 당시 독일공사관조차 왕비의 생존 사실을 본국에 타전하는 외교적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김홍집 친일내각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12월 1일에야 황후의 붕어 사실을 국민에게 알렸다.
경복궁이 초토화되고 왕비까지 살해되면서 고종이 안전하게 거처할 땅은 한 조각도 남지 않았다. 갑오왜란 이후 을미왜변을 거치며 조선은 사실상 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황후 살해에 복수심을 느끼는 백성들이 전국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을미의병이라고 부른다. 이 을미의병은 대개 고종의 밀지를 받고 거의했다. 그리고 고종과 의병의 합작으로 아관망명이 준비되고 실행된다. 을미의병의 대부분은 동학농민군의 재봉기였다. 그런 점에서 갑오왜란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이런 가운데 황후의 장례는 곧바로 치러지지 못했다. 2년2개월 후인 1897년 11월 22일에야 장례가 치러질 수 있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한 달 만에 대한제국 선포의 의미를 대외적으로 과시한 행사가 바로 명성황후 장례식이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너무 모르고 지내 왔다. 그 이유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