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기타)/History(역사)

정유재란

2017. 7. 8. 19:51

[토요기획]기단만 남은 순천왜성 천수각… 그날의 참상 기억하는지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로 이용한 순천왜성(노란 점선). 조명연합군의 거점지였던 검단산성은 사진 오른쪽 상단에 있다. 순천=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기자는 지난달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위치한 왜교성(倭橋城·순천왜성)을 찾았다. 정유재란의 역사 현장을 살피기 위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다. 1597년 12월에 축성된 왜교성은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군사 1만4000여 명을 이끌고 주둔한 성이다.  

1597년 2월 일본의 관백(關白·일왕을 대리하여 정무를 총괄하는 직책)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그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성과 이름을 여러 차례 바꾸었음)는 명나라와 4년간에 걸친 강화협상이 깨지자 재침을 명령한다. 정유재란이다. 일본군은 대마도를 거쳐 부산포로 진입한 후 충청도 직산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간다. 그러나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에 막혀 다시 순천, 울산, 사천 등지로 후퇴한다.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의 전략 요충지에 왜성을 지은 후 장기 농성전에 들어간다. 정유재란의 중요 전투는 이들 왜성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특히 순천 왜교성이 정유재란의 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크다. 사상 최초로 조명(朝明)연합 육군과 해군 4만2000여 명이 수륙병진(水陸竝進) 전략을 펼친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한중일 삼국을 대표하는 용장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지금의 지형은 420년 전의 그때와 많이 변했다. 섬이었던 장도(獐島)는 흙으로 메워져 육지처럼 변했다. 그래도 왜교성에서 보면 당시의 수륙 전투 장면을 실감할 수 있다. 왜교성 앞 바다 쪽의 장도에는 이순신(李舜臣) 삼도수군통제사와 진린(陳璘) 도독의 조명연합 수군이 버티고 있었고, 왜교성 뒤 육지 쪽의 검단산성에서는 권율(權慄) 도원수와 유정(劉綎) 제독의 조명연합 육군이 막고 있었다.

고니시의 왜교성(면적 18만8000여 m²)은 당시 일본의 축성 수준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그러나 이 성은 일본군이 세웠다는 이유로 복원 작업이 제대로 돼 있지 않다. 현재 성곽 외성(길이 2502m) 중 상당 부분이 훼손돼 있고, 왜교성을 상징하는 천수각(天守閣· 일본군 지휘부이자 망루대) 역시 기단(基壇) 일부만 남아 있다. 왜장 고니시가 머물렀던 천수각 기단에 올라 서 보았다. 장도와 검단산성이 눈앞에 펼쳐졌다.  

 
왜성 위의 고니시: “구리스토님! 살려주소서”

기단만 남아 있는 순천왜성의 천수각. 왜장 고니시가 머물렀던 곳이다. 순천=박영철 기자
1598년 음력 9월 15일, 순천 왜교성의 천수각. 밤이 되면서 바람도 없다. 가을 하늘에 뜬 보름달은 여느 때보다 더 둥글고 커 보였다. 철썩철썩 뜸을 들이며 성벽 아래를 때리는 파도 소리는 달빛과 어울려 묘한 운치를 자아냈다. 그러나 폭풍전야의 평화로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