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기타)/History(역사)

國運風水]

2017. 6. 18. 21:16

[Why] 부친 묏자리로 富貴 얻고… 자신은 납작 엎드릴 곳 찾은 정인지

 

 

[김두규의 國運風水]

아버지와 아들의 무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세계관이 전혀 다른 자리인데 한 사람이 잡은 자리이다. 정인지(1396~1478)와 아버지 정흥인의 경우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충남 부여 능산리에 정흥인 묘가 있다. 입구에는 와영담(蛙泳潭), 즉 개구리가 헤엄치는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개구리 수영장'이 만들어진 것은 무덤터가 큰 뱀[長蛇]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큰 뱀이 개구리를 쫓는 장사축와형(長蛇逐蛙形)의 땅이다. 뱀이 개구리를 추적함에 그치지 않고 아예 개구리들로 하여금 집단 서식하도록 연못을 만들었다. 개구리는 뱀의 먹이가 된다. 얼마나 먹거리가 풍부하겠는가? 세조 때 조선의 4대 부자[四富] 가운데 하나인 정인지가 그 아버지(정흥인)를 위해 잡은 무덤 자리이다. 당시 사부(四富)는 박종우·윤사로·윤사윤·정인지였다. 이 가운데 정인지만이 한미한 출신이었다. 정인지 스스로 집안을 일으켜 세워 왕실과 겹사돈을 맺었다. 증손녀가 중종의 아들 덕흥군에게 시집을 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선조 임금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왕실은 정인지의 외손들로 이어진다.

이미지 크게보기
정인지의 아버지 정흥인 묘와 그 옆에 조성된 호수 ‘와영담(蛙泳潭)’(좌). 정면에서 찍은 정인지 묘 (우). / 김두규
정인지는 조선 풍수학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풍수학에 관여하게 된 것은 경복궁과 태종의 무덤(헌릉) 논쟁 때문이었다. 경복궁과 헌릉이 길지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풍수학을 강습하게 한다. 이때 정인지가 총책임자(풍수학제조)로 임명된다. 그만큼 정인지는 풍수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는 정치적 감각도 뛰어나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만드는 데 역할을 했다. 그래서 세조와 막역했다. 언젠가 세조가 정인지를 위해 술잔치를 벌였다. 대화 주제가 풍수로 바뀌었다. 물 만난 정인지가 풍수에 대해 현란한 말을 이어갔다. 흥이 다했던지 세조를 보며 마무리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풍수의 심오한 것까지 들어가면 전하께서는 잘 모르실 것입니다." 순간 주변이 썰렁해지고 대신들은 좌불안석이 되었다. 세조 자신도 대군 시절 부왕의 명으로 풍수 공부를 깊게 하였다. 왕실 풍수를 직접 주관할 정도로 세조도 나름 자부감이 있었다. 자존심이 상한 세조는 "그대가 뭐 그리 잘나서 남을 깔보느냐?"라고 질책하고 잔치를 깨뜨렸다(정인지 18대손 정찬문 충북대 교수 증언). 정인지 탄핵 상소가 올라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처럼 세조는 "취중 실수"라는 이유로 용서하였다. 심지어 한번은 취중에 정인지가 세조를 "너"라고 불렀다. 그때도 탄핵 상소가 빗발쳤지만 "취중 실수"라고 세조는 용서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종종 등장하는 장면이다.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인지였다.

그러나 그가 권력의 속성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가난하게 태어나 부자로 산 것이 흠이다"고 늘 자성하면서 후손들에게 3가지 훈계를 남겼다. 첫째, 태평 시절이든 난세이든 늘 근신하라. 둘째, 세상이 다할 때까지 명당(풍수)을 지켜라. 셋째, 정인지의 자손임을 명심하라. 유훈으로 남길 만큼 풍수는 그에게 중요했다.

정인지 무덤은 충북 괴산 외령리에 있다. 아버지 무덤과 멀리 떨어져 있고 연고가 없던 곳이다. 충청도 관찰사 시절 이곳을 지나면서 우연히 잡았다. 이유가 정인지답다. 무덤 자리는 늙은 쥐가 내려오는 형국인데 그 앞산이 고양이 산[猫山]이다. 게다가 정인지 자신이 쥐띠이다. 고양이 앞에 쥐는 몸을 낮출 수밖에 없다. 한미한 출신으로 최고의 권력과 부를 이룬 자의 처세술이다. 아버지 묏자리를 잡을 때는 부귀를 쟁취하기 위하여 뱀의 먹이가 풍부하도록 개구리 연못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원하는 바를 이룬 뒤 그는 납작 엎드릴 곳을 찾았다. 정인지의 창업과 수성의 풍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