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수염 걸린 자신 살린 외과 지원
미 클리블랜드서 다양한 기술 익혀
암 재발 안 되는 복강경 수술 입증
각국서 “로봇 수술법 가르쳐 달라”
시범 위해 13개국 의사면허증 보유
노벨상 주관 스웨덴에도 비법 전수
고려대 안암병원 김선한 교수(60)의 연구실 책상 위에는 이 글귀가 수놓인 작은 액자가 있다. 30대 여성 장애인 환자가 선물한 것이다. 재작년 휠체어를 타고 처음 진료실 문을 연 환자는 좀체 말을 하지 않았다. 얼굴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느님, 장애에다가 암까지!”
김 교수는 며칠 고민하다 환자에게 입을 열었다. “기술적으로 항문을 살릴 수는 있지만, 휠체어 생활에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겠어요. 인공장루를 다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환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외래에서 환한 얼굴로 이 액자를 선물한 것이다.
대장암의 복강경, 로봇 수술의 세계적 대가이지만 김 교수는 늘 환자의 마음을 생각하는 치료로도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인턴 말기에 충수염에 걸렸다. 수술은 잘 됐다는데,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왔다. 가스가 빠져야 하는데 방귀는 나올 기미가 없었고 계속 토하기만 했다. ‘이러다가 죽는구나, 재수술이라도 받다가 죽었으면….’ 1주일 뒤 소원대로 재수술을 받았다. 뱃속에서는 장이 꼬여서 썩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수술 뒤 제대로 회복도 못하고 전공의 과정에 들어가야 했다. 이때 한 전공의 선배가 “자네는 외과에서 꽂는 모든 관을 다 꽂아 봤으니 환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삼아 GS(General Surgery·일반외과)에서 GS(Great Surgeon·위대한 수술의사)가 될 것이네”라고 격려했다. 그 선배의 말대로 됐다.
의사인 어머니가 혼자 탯줄을 끊는 산고 끝에 태어난 김 교수는 어릴 적부터 의사가 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어머니는 고려대 의대의 전신인 서울여자의대 출신이었고 외증조부는 현상윤 고려대 초대총장. 망설이지 않고 고려대 의대에 들어왔지만 본과에 올라갈 무렵, 의사가 소명인지 의문이 생겼다. 수업을 빼먹고 전국을 유랑했다. 스승인 홍승길 교수가 등을 떠밀어 시험을 보게 하지 않았다면 의대 졸업도 못할 뻔 했다.
이듬해 김 교수는 클리블랜드로 연수를 떠났다. 미국에서는 타국 의사를 수술실에 들어오지 않게 하는데, 수술이 복잡하고 어려워서 미국 의사들이 안 들어가려 하는 바람에 대신 들어가서 온갖 기술을 배웠다. 밤에는 동물실험에 매달렸고 주말에는 밀섬 교수로부터 논문 지도를 받았다. 당시 복강경 수술을 받으면 구멍 뚫은 자리에 암이 재발한다는 사례가 잇따라 보고돼 논란이 있었는데, 김 교수는 제대로 수술하면 재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 냈다. 2년 동안 논문 8편을 발표했고 귀국 직전에는 병원이 매년 한 명 선정하는 ‘최우수 펠로우’ 상을 받았다.
1997년 귀국했지만 갈고닦은 실력을 써먹을 수가 없었다. 학계에서는 복강경 수술의 효용에 대해서 반신반의했고, 안산에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싼 수술을 받을 환자가 드물었다. 클리블랜드에서 함께 연수했던 준지 오코다 오사카대병원 교수는 논문을 계속 발표하고 있었다. 가위바위보도 져선 안 된다는 한·일전에서 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때 서울 석촌동 한솔병원의 이동근 원장이 “전폭적으로 지원할 테니 마음껏 수술하라”고 손을 내밀었다. 김 교수는 2000년 말 고려대에 사표를 내고, 이듬해부터 4년여 동안 500여 명을 복강경으로 수술했다. 2, 3개월마다 수술 동영상을 국제학회에서 발표했고 중국·대만·태국·인도 등에서 한 수 가르침을 받으려는 의사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개원 병원의 특성 때문에 국내 의사들에게 ‘비법’을 가르치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김 교수는 2005년 동국대 일산병원이 개원할 때 이석현 초대 원장의 설득에 따라 자리를 옮겼다. 이 원장은 고려대 구로병원 출신으로 “서울아산병원 소화기내과의 민영일 교수가 오기로 돼 있으니 함께 일을 내보자”고 권했다. 김 교수는 이듬해 미국 소화기내시경복강경학회에서 자신이 수술한 310명의 중장기 생존율을 발표하면서 미국 의사들이 두려워하는 직장암 수술의 노하우를 밝혀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동국대병원은 김 교수의 꿈을 채우기에는 좁았다. 마침 김 교수의 동기인 나누리병원 장일태 이사장이 모교에 발전기금을 쾌척하면서 “고대의료원이 성장하려면 김선한 같은 사람을 불러들여야 한다”고 권유했다. 2006년 고려대 안암병원은 ‘대장암 복강경 수술실’을 마련하고 김 교수를 불렀다.
김 교수는 이듬해 로봇 수술의 필요성에 눈을 떴다. 그러나 로봇 수술의 효용에 대해 논란 중이어서 병원은 기계 구입을 망설였다. 김 교수는 비뇨기과 천준 교수와 함께 “병원에 손해가 나면 책임지겠다”는 각서를 쓰고 수술로봇 도입에 총대를 멨다.
2008년 1월 김 교수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국제 로봇 학술대회’에서 대장암 수술법에 대해서 발표했다. 본사 임원진들이 찾아와 “우리가 생각했던 아이디어를 구현하다니 감동했다”며 교육 자료를 만들어 주기를 부탁했다. 그해 9월부터 김 교수팀이 만든 교육 자료가 각종 학술대회에서 배포됐고,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 의사들이 가르침을 받으러 오게 됐다.
2009년에는 클리블랜드 클리닉에서도 “로봇 수술을 배우고 싶다”는 요청이 왔다. 김 교수는 미국 의료진을 위해 심야에 수술했고, 화상으로 수술 장면을 지켜보던 의사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김 교수는 미국 최고 권위의 메이요클리닉, 노벨상 선정을 주관하는 스웨덴 캐롤린스카 의대 등에서도 수술법을 가르쳤다. 김 교수는 13개국의 의사면허증이 있다. 수술시범을 할 때 자국 의사면허증이 있어야 하는 국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의사가 천직이라는 것을 이제는 굳게 믿고 있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