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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기를 다스리던 황기

2018. 8. 6. 18:27

[이상곤의 실록한의학]〈57〉열기를 다스리던 황기

 

 

 
1795년(정조 19년) 6월 정조는 강화도에 유배 중인 이복동생 은언군 이인을 대궐로 불렀다. 신하들은 “역적의 화근인 은언군을 만나지 말라”고 간언했다. 그러자 정조는 “더위에 땀이 나는데도 황기를 쓰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동생인 은언군을 만나는 일은 ‘더우면 땀이 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인데 이를 왜 병리현상으로 치부해 황기라는 약을 쓰라 하느냐는 비유였다.

황기는 다한증을 다스리는 대표적 한약재였다. 한의학에서 땀은 습(濕)과 열(熱)이 합해져 나오는 것으로 본다. 땅의 습기가 태양의 열기를 만나 구름, 비, 안개를 만들 듯 비위(脾胃·지라와 위장)가 만든 음식물 진액(습기)과 인체의 태양인 심장의 열이 만날 때 땀이 만들어진다는 것. 따라서 심장에 영향을 미치는 스트레스나 위장에 영향을 미치는 과식, 음주 등이 다한증의 원인인 경우가 많다.

원인과 종류는 다양하지만 조선시대 다한증을 치료하는 대세 약물은 역시 황기였다. 영조 17년 어의 김응삼은 영조가 여름감기로 인해 땀을 심하게 흘리며 피로를 호소하자 생맥산에 더해 많은 양의 황기(8g)를 처방했다. 영조의 면역기능을 강화해 감기를 치료하고 땀을 줄여보려는 처방이었다. 피부와 면역 기능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우리 몸을 방어하는 성벽 노릇을 하는 것으로 김응삼은 이들의 기능을 강화해 영조의 감기와 다한증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양의 황기를 썼다. 실제 황기에는 사포닌 성분인 아스트라갈로시드, 당류인 글루코스, 점액질이 포함돼 있어 면역기능을 강화한다는 논문이 많다. 

 
황기의 이런 효능은 민간에서 더 잘 알았다. 옛 할머니들은 오뉴월만 되면 황기 한 줌을 닭 한 마리와 함께 넣어 푹 고아낸 황기닭곰탕을 가족들에게 해주곤 했다. 여름철 다한증을 예방하고 가을철 급격한 온도변화로 인해 생기는 감기나 알레르기성 비염을 미리 막아보겠다는 경험칙의 민간 처방이었던 셈.

황기닭곰탕에 들어간 누런 암탉도 여름철 떨어진 입맛을 돋우고 무기력증을 치료하는 일등공신이었다. 동의보감은 ‘허약한 기를 보(補)하고 음식을 잘 못 먹는 비위허약 증상을 치료한다’고 적고 있다. 특히 조선의 닭은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은 약용 가금류였다. 중국 명대의 약초서인 본초강목은 ‘약용으로는 조선 닭을 사용하는 게 좋다. 조선의 평택에서 주로 서식한다. 조선의 닭은 장미계로 꼬리 길이가 3, 4척이나 된다’고 썼다. 조선 중기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에도 ‘조선의 닭은 한계(韓鷄)라고 하는데 그 명칭은 삼한(三韓)으로부터 비롯됐으며, 그 꼬리가 5척이 넘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황기는 다한증뿐 아니라 소변을 시원하게 보도록 하는 등 전립샘 질환의 치료와 기가 허약해 생기는 탈항·자궁하수 증상, 자려고 누우면 북소리 같은 소음이 들리는 이명증상 치료에도 도움을 준다. 알수록 쓸모 있고, 여름이면 더 쓸모 있는 약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