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은행나무는 보았다, 남산에서 벌어진 경술년 치욕을
[128] 남산 통감관저와 100년 전 경성 도시계획
100년 전 사진 한 장을 본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 셋이 앞에, 그 뒤로 사내 셋이 언덕을 오른다. 언덕 위 건물이 웅장하다. 왼편에 까치집이 있는 나목(裸木)은 은행나무다. 일제 강점기 조선 명소를 소개하는 사진엽서다. 가운데에 누군가가 이렇게 펜으로 적어 넣었다. '豊公(풍공)이 한국을 정벌할 때 淸正公(청정공)이 말을 묶었던 은행나무.' 풍공은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청정공은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다. 그러니까 임진왜란 때 한성에 입성한 가토 기요마사가 남산에 진을 치고 이 은행나무에 말을 쉬게 했다는 이야기다.
펜글씨 아래 영어와 한자로 이렇게 인쇄돼 있다. '남산총독관저(南山總督官邸)', 'THE GOVERNOR GENERAL OFFICIAL RECIDENOE(RESIDENCE의 오타)'
그때나 지금이나 조선 사람에게 이 사진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 바로 이 자리, 이 총독 관저에서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국 3대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조선을 일본에 넘기는 병탄 조약에 서명을 했다. 그러니까 경술국치(庚戌國恥)가 공식적으로 조인된 현장이다. 이러구러 사연 끝에 건물은 사라지고 21세기가 되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다. 은행나무는 더 커졌고 언덕길은 똑같다. 이 여름 가족, 연인, 친구들이 손잡고 놀러 가는 서울 남산에 숨은 서글픈 100년 전 이야기.
1910년 7월 통감 데라우치 부임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 일본에서는 조선 병합을 주장하는 강경파가 득세했다. 조선에서 활동하는 친일 세력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해 12월 4일 송병준이 만든 친일 조직 일진회가 한·일 합방성명서를 발표했다. 친일 경쟁을 하고 있던 총리대신 이완용은 속이 달아올랐다. 18일 뒤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 추도식이 서울 종현교회에서 열렸다. 열아홉 살 먹은 유학파 기독교도 이재명이 식에 참석한 이완용을 칼로 세 번 찔렀다. 이완용은 죽다 살아났고 이재명은 이듬해 9월 30일 사형당했다.(조선총독부 관보 1910년 10월 4일) 이재명이 사형되기 석 달 전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3대 조선 통감으로 부임했다. 1910년 7월 2일이다. 죽다 살아난 이완용에게는 게임을 뒤집을 절호의 기회였다.
1910년 8월 14일 '혈의 누' 이인직
데라우치가 부임한 뒤 8월 14일 밤 11시 이완용의 비서가 통감부 외무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를 찾아갔다. 비서 이름은 이인직이다.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血の淚)'를 쓴 그 이인직이다. 고마쓰 미도리는 1900년 나랏돈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 이인직의 동경정치학교 은사다. '혈의 누' 줄거리는 이렇다. '청나라 군인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여자 옥련을 일본군이 구해줌.' 두 차례에 걸친 심야회담에서 이인직이 말했다. "지난해 이토 공이 한인 악한(惡漢)에 돌아가신 이래 급속하게 병합의 실행을 볼 것으로 생각되었기에 총리 이완용 각하는 여러 가지 고려를 짜고 계십니다."('경성일보' 1934년 11월 25일, 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재인용) 이완용은 이인직을 통해 '가급적 빨리 병합을 실행하자'는 뜻도 전했다. 일진회에 공(功)을 빼앗길 판이었다. 8월 16일 이완용이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통감 관저를 방문했다. 농상무대신 조중응과 함께였다. 조중응 또한 고마쓰의 제자였다.
엿새 뒤인 8월 22일 오후 1시 창덕궁 흥복헌에서 순종이 주재하는 회의가 열렸다.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회의였다. 실록은 이렇게 짤막하게 기록한다. '국무대신 외에 황족과 원로들이 모여 한일 합병 조약안을 토의하다. 한일 합병 조약을 맺도록 하다. 한일 합병 조약이 이루어지다.'(1910년 순종 3년 8월 22일 실록) 회의 직후 대한제국 전권위원 이완용은 다시 통감 관저를 찾아 일본 전권위원 데라우치와 함께 한일 병합 조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조중응이 수행했다. 이완용은 일본어를 몰랐다. 그러니 일본 유학파 조중응과 이인직을 '시다바리(시타바타라키·したばたらき)'로 쓴 것이다.
경성시구 개수 계획
순식간에 나라가 사라졌다. 이후 일본은 말 그대로 자기 마음대로 대한제국 수도 한성을 재설계했다. 먼저 수도 한성은 경기도 도청소재지 경성부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1912년 11월 6일 통감부 후신인 조선 총독부는 관보(官報)를 통해 '경성시구 개수예정계획'을 발표했다. 모두 29개에 걸쳐 경성 시내에 신작로를 내거나 도로 직선화 작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대개는 기존 도로와 일치하는데, 눈에 띄는 신작로가 있다. 바로 창덕궁 돈화문에서 남산에 이르는 제9호 도로다. 게다가 지금 을지로인 황금정통(黃金町通)에는 방사선으로 로터리까지 설계돼 있었다.
한·일 병합과 함께 황제는 오직 일왕 메이지(明治)밖에 없었다. 고종 거처는 덕수궁에 국한됐고 순종 거처는 창덕궁으로 결정됐다. 선왕 고종 공식 명칭은 도쿠주노미야 이태왕(德壽宮李太王)이 되었다. 황제 순종은 쇼토쿠노미야 이왕(昌德宮李王)으로 격하됐다. 바로 그 창덕궁에서 통감 관저가 있는 남산까지 일직선으로 길을 내겠다는 계획이다. 방사선 로터리는 무산됐지만 제9호 도로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지금 그 길 이름은 돈화문길이다. 지금도 종묘 옆 종로3가 사거리에서 남쪽을 보면 남산이 훤히 올려다보인다.
왜성대와 일본헌병대
원래 일본 공사관은 서울 지하철 서대문역 2번출구 근처에 있었다. 금화초등학교 자리다. 그런데 1882년 임오군란 때 분노한 구식 군대가 공사관을 불태웠다. 인사동 박영효 집으로 이전한 공사관은 1884년 갑신정변 때 또 불에 탔다. 이후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이 남산이었고,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통감 관저로 사용됐다. 관저가 있는 남산 주변은 옛날부터 왜성대(倭城臺)라 불렀다. 세간에서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성을 쌓고 주둔했다'는 이야기가 수백 년 전부터 내려왔다. 관저 입구에 있는 노거수 은행나무는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말을 묶었다는 이야기도 그럴 듯하게 전해왔다. 사실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일본에는 상당히 유서 깊은 곳이 남산 왜성대다.
임진왜란 발발 312년 뒤인 1904년 바로 그 왜성대 자리에 일본헌병대 사령부가 설치됐다. 앞서 말한 제9호 도로 끝이 헌병대사령부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벌이던 조선 사람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부대가 이 사령부에서 출동한 헌병들이었다.
남산에 모인 일본 권력
통감 관저에서 병합조약을 조인한 일본은 곧바로 총독부를 설치했다. 관저 서쪽에 있던 통감부는 총독부가 됐다. 헌병대 입구에 있던 사육신 박팽년 집터는 총독부 정무총감 관저가 됐다. 그러니까 명동 일대를 장악한 상권, 총독부로 상징되는 행정권, 헌병대로 상징되는 무력이 남산에 밀집됐다. 1926년 광화문을 철거하고 총독부 신청사가 경복궁 안에 들어섰다. 총독 관저도 경복궁 뒤편에 신설됐다. 일본군사령부는 1908년 용산으로 이전했다.
남산, 해방 이후
그리고 해방이 되고 21세기가 왔다. 헌병대와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자리는 수도경비사령부가 들어섰다가 1998년 남산한옥마을로 변했다. 헌병대가 있었다는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정무총감 관저는 해방 후 영빈관으로 쓰이다 지금은 식당 한국의 집이 됐다. 입구에는 '박팽년 집터'라는 표석만 있다.
경술국치 현장인 통감 관저는 1937년 지금 청와대 자리에 총독 관저가 준공되면서 시정기념관으로 바뀌었다. 해방 후 이런저런 용도로 쓰이다 중앙정보부 창설과 함께 오랜 세월 금단의 땅이 됐다. 건물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모른다. 옛 통감부, 총독부 청사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로 변했다.
2006년 1월 사학자 이순우가 각종 문서와 옛 사진, 신문을 통해 통감 관저 자리를 찾아냈다. 을사늑약의 일본 주역인 전(前)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동상 좌대도 찾아냈다. 2015년 서울시는 이곳에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기리는 '기억의 터'를 만들었다. 가토가 말을 묶었다는 은행나무, 언덕길은 100년 전과 변함이 없다. 임진왜란과 경술국치와 해방과 대한민국의 기적을 다 겪은 은행나무는 1996년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됐다. 역사에 지우개는 없다. 지워지지 않는다.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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