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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정전협정과 기이한 용산 왜명강화비

2018. 8. 1. 11:02

박종인의 땅의 歷史] 그들이 협상을 하는 사이 조선은 철저하게 유린됐다

[131] 임진왜란 정전협정과 기이한 용산 왜명강화비

이상한 비석 하나

1902년부터 1940년까지 서울 용산구 용산문화원 자리에는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라는 일본인이 살았다. 고층건물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주변보다 높아 옛날에는 한강이 바라보였다. 사람들은 용산에서 보는 한강을 '용호(龍湖)'라 했다.

이노우에는 대한제국 시절인 1899년 전철 차량 제작을 위해 한성전기회사로 초빙된 기술자였다. 이후 여러 기술적 사업을 벌이다 일본으로 돌아간 사내였다.(김명수, '대한제국기 일본인 기술자 이노우에 요시후미 연구') 856평 너른 집터였다. 그 위쪽 1586평 대지는 나라 팔아먹은 대가로 막대한 돈과 백작 작위를 받은 을사오적 이지용(李址鎔) 소유였다.(1912년 총독부 지적도)

이노우에가 살기 전 집터에는 조두순이 살았다. 흥선대원군 시절 영의정을 지낸 사람이다. 띄엄띄엄 몇 십 년을 제외하고 집터는 대대로 조두순 집안 소유였다. 영·정조 때 벼슬을 했던 조두순의 증조부 조영극이 이 터에 정자를 짓고 살았다. 어느 즈음에 가문이 몰락하고 훗날 증손자 조두순이 입신양명을 하였다. 그때 조두순이 남에게 판 이 집터와 정자를 되사고 이렇게 기록했다. '용호에 임하여 조금 동쪽 기슭으로 들어진 곳에 정자가 있는데 심원정(心遠亭)이라 한다. 실로 내 증조부 치헌 공(치헌은 조영극의 호다)께서 처음 세운 것인데 중간에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가 거의 60년 후에 나 조두순이 다시 구입하였다.'(조두순, '무진루기발(無盡樓記跋)', 이종목, '조선 시대 경강의 별서' 재인용) 2018년 여름, 용산문화원 오른쪽 언덕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心遠亭 倭明講和之處'(심원정 왜명강화지처)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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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용산문화원 옆 언덕에는 임진왜란 강화협정을 기념하는 비석이 서 있다. ‘倭明講和之處(왜명강화지처)’라 적혀 있다. 비석 출처도 수수께끼거니와, 왜 임진왜란 당사자인 조선을 배제하고 일본과 명이 정전협상을 벌였는지, 그리하여 조선 땅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돌덩이다. 왼쪽에 있는 느티나무는 670살 넘은 나무다. /박종인 기자

바로 이 비석 이야기다. 1593년 4월 조선에서 벌어진 국제전쟁, 임진왜란 정전협상이 벌어진 자리다. 협정 당사국은 명나라와 일본이었다. 조선은 배제됐다. 협상은 결렬됐고 조선은 의지와 무관하게 유린당했다. 그 기념비가 용산에 있다. 왜 '명왜'가 아니고 '왜명'인가. 왜 임진왜란 200년 뒤 세운 정자 심원정 이름이 들어 있는가. 비석은 누가 세웠는가.

오로지 국익을 위한 참전

1592년 4월 14일 경상도 동래에 상륙한 일본군은 상주와 문경과 충주를 거쳐 한성으로 입성했다. 20일 걸렸다. 그보다 이틀 전 선조는 의주를 향해 도주했다. 마음속 목적지는 명나라 요동(遼東)이었다. 피란이 아니라 '내부(內附)', 황제국가로 들어가서 붙어살겠다는 뜻이었다.(1592년 5월 1일 '선조실록') 류성룡을 비롯한 몇몇 관료 만류에 발걸음은 압록강 남쪽 의주에서 멎었다. 그때 '나라는 나라가 아니었고(國非其國)'(이이, '진시폐소(陳時弊疏)', 1582년), '하늘이 도와야 살 수 있는(天贊)'(류성룡, '징비록') 나라였다. 곧 무너질 큰 집 같았다.

개전 60일 만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가 평양을 점령했다. 6월 15일 요동 총병 조승훈이 오천 기병을 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이 예뻐서 참전한 게 아니었다. '(압록강 너머 요동에서) 왜군을 막으려면 군사가 수십만 필요하지만 조선에서는 수만이면 된다(防守兵馬則當以數十萬計 數萬計與數十萬計).'(정탁, '經略侍郞宋應昌一本', 용사잡록) 명나라 총사령관 송응창이 조선 측 담당관 정탁에게 한 말이다. 조선이 패전하면 명이 위협받는다는 국익 논리였다. 안보. 더도 덜도 아니었다.

그런데 조선을 구원하러 온 이 천군(天軍)이 오랑캐에게, 평양에서 궤멸됐다. 7월 17일이다. 명나라는 이여송을 제독으로 한 2차 원군을 출병시켰다. 5만 대군이었다. 조명연합군은 이듬해 1월 평양에서 고니시 부대를 격퇴했다. 하지만 피로 얼룩진 승리였다. '명 군사 사상자도 많았으며 평양 전투에서 벤 수급 중 절반이 조선 백성이며,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1만여 명도 모두 조선 백성이라고 하였다.'(1593년 1월 11일 '선조실록') 뭐가 됐든 이 승전보에 의주에 있던 조선 정부는 환호했다. 지금부터 기이하다.

이여송은 '퇴로를 열어 달라'는 고니시 요청을 받아 이들을 무혈로 퇴각시켰다. 평양 참패 한 달 뒤 명은 이미 상인 심유경을 평양으로 들여보내 종전협상에 들어간 것이다. 목적은 일본군의 요동 진입 저지였다.

싸울 의지 없는 구원군

전비 마련을 위해서는 백성을 쥐어짜야 했다. 게다가 명나라에는 가뭄과 메뚜기 떼가 들끓어 막대한 피해가 나고 있었다(百姓之苦極矣 又加以旱災蟲災).(余繼登, '朝鮮撤兵議',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재인용) 명 지휘부는 대륙으로 확전을 막고 조선 내 국지전으로 전쟁을 끝내려 했다. 평양 회복으로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도 달성됐다. 적당한 선에서 발을 빼자는 작전이 이후 전쟁 종료까지 이어졌다. 이여송이 파견되기 전 심유경과 고니시는 평양에서 다시 한 번 만나 단기간 휴전에 합의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평양에 있던 고니시 부대는 이여송의 조명연합군에 참패해 남쪽으로 후퇴했다. 협상을 주도한 사람은 총지휘관 송응창이었고, 공을 다투던 이여송은 송응창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여송은 송응창을 무시하고 이들을 쫓아 남하하다가 경기도 파주 벽제관에서 매복전에 걸려 대패했다. 명나라 지휘부는 이를 계기로 무력전을 버리고 협상전을 확정했다.(한명기, '임진왜란기 명·일의 협상에 관한 연구') 겉으로는 전쟁이되 속으로는 강화요, 겉으로는 토벌이되 속으로는 위무(陽戰陰和陽剿陰撫)였다.(명사 조선열전 1597년 8월)

명, 조선 전투를 방해하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제독의 군중에게서 강화가 이루어진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환호 소리가 우레와 같았습니다'(元翼曰 提督軍中 一聞和議之成 莫不喜悅 歡聲如雷).'(1593년 3월 23일 '선조실록') 명나라 군사들은 귀향 소식에 환희작약했다. 조선군은 무장해제됐다. '송응창이 명군에게는 왜적을 죽이지 말라 하고 우리 군에게는 교전하지 말라 명했다. 저들은 나아가 싸울 뜻이 전혀 없다. 불공대천(不共戴天)의 흉적이 온전히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매우 통탄스럽다.'(1593년 4월 6일 '선조실록') 이순신은 '왜적을 섬멸하려 하여도 매번 (진린) 도독에게 중지당하니 걱정스럽기 그지없다(每爲提督所抑止 不勝悶慮)'(1598년 9월 10일 '선조실록')고 했다. 명에 절대적으로 의지했던 선조까지 '몇 부대가 거짓 투항하면 송응창이 마음을 돌릴 것'이라고 아이디어를 낼 정도였다.(1593년 3월 38일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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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촉석루. 임진왜란 정전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총공세를 명한 2차 진주성전투 현장이다. 명나라 부대는 원군을 거부했다. 진주성 백성과 군은 전멸했다.

전쟁 내내 그랬다. 전쟁 후 1625년 조선에 왔던 명나라 학자 강왈광(姜曰光)은 '명이 조선의 믿음을 저버렸음에도 조선은 명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재인용)

춤추며 퇴각한 일본군

벽제관 패배 후 이여송이 개성으로 퇴각했다. 행주산성에서 권율의 의병이 대승했다. 용산에 주둔해 있던 고니시 부대가 의병장 김천일을 통해 강화를 요청했다. 강화 협상은 지휘권을 가진 명나라가 맡았다. 조선은 배제됐다.('징비록')

1593년 3월 7일 명 대표 심유경이 한성 용산에 있는 고니시와 정전협상을 재개했다. 정전 조건은 서로가 황당했다. 명은 도요토미를 일본 왕으로 봉한다(일본은 이미 천황이라는 공식 왕이 있다), 일본은 명나라 황실 여자를 아내로 받는다, 조선을 일본과 명이 분할한다 등등.

협상은 이뤄질 수가 없었다. 협상 실무자끼리 조작한 조건을 주고받은 뒤 4월 19일 일본군은 남쪽으로 퇴각했다. 명군 총사령관 송응창은 후퇴하는 일본군을 호위하고, 조선군에게는 '군공(軍功)을 탐하여 뒤떨어져 있는 적을 살륙하는 자가 있으면 참형에 처한다'고 포고했다.(1593년 4월 26일 '선조실록') 일본군은 '풍악을 울리고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해상에 이르러'(1593년 4월 1일 '선조수정실록') 성을 쌓고 장기전에 들어갔다. 이여송의 동생 이여백이 기병 1만기를 앞세워 이들을 추격했는데, 갑자기 발이 아프다면서 가마를 타고 도로 성으로 들어왔다.(같은 날 '선조수정실록')

명 협상단은 5월 23일 바다 건너 나고야에서 도요토미를 접견했다. 6월 28일 협상단이 출국한 다음날, 조선 전역에서 집결한 10만 일본군이 진주성을 함락했다. 협상으로 손발이 묶인 조선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6만 성민이 전멸했다. 고니시의 협상 의사를 전달한 의병장 김천일도 이 전투 때 죽었다. 이후 4년 동안 협상이 진행되다가 결국 결렬됐다. 도요토미는 다시 조선 공격령을 내렸다. 정유재란이다. 1년 남짓한 전쟁이었지만 피해는 엄청났다. '조선'의 피해는 엄청났다. 전쟁은 이순신이 끝내고 죽었다.


이게 임진왜란 300년 뒤 용산에 살게 된 일본인 집터에 '왜명강화지처' 비석이 서 있는 이유다. 기록에는 '(심 유경이) 배에 이르러 고니시, 가토와 회담했다(到船 招平行長與言 而淸正亦會 相迎講和)'(1593년 3월 27일 '선조실록')고 돼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은 그 자리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정자 심원정이라 대대로 믿고 살았다. 잘못되었으나, 그리되었다. 심원정에 살던 이노우에도 그러하였다. 세운 사람도 날짜도 없는 이 수수께끼 비석을 없애면 안 되는 이유다.



[출처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