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랑쉬오름과 아끈다랑쉬오름. 봄날의 제주 중산간은 평화롭다. 그러나 70년을 숨기고 살아온 사연을 알고 나면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이 고운 들녘에도 4ㆍ3의 상처가 배어있다. 손민호 기자
제주의 4월은 유난히 곱다. 유채꽃 만발해 눈부시고, 청보리 올라와 푸르르다. 하나 4월 제주의 상춘곡(賞春曲)은 서럽다. 숨죽여 흐느낀 70년 세월이 바람결에 실려 섬을 떠돌기 때문이다. 제주를 드나들수록 제주의 흉터가 눈에 밟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제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4ㆍ3 아픔 배어 눈물겨운 탐라의 봄
제주 4ㆍ3 70주년 제주방문의해 개막
유적지 대부분 유명 관광지 곁에
상흔 어루만지는 의미 깊은 여행
사려니숲길ㆍ송악산ㆍ함덕 해변 등
이름난 풍광 뒤에 참상 숨어있어
올해는 제주 4·3 70주년이다. 4·3 70주년을 맞아 제주도는 ‘제주방문의해’를 선언했다. 언뜻 어색한 조합이다. 관광 활성화 사업에 현대사의 불행을 앞세웠다. “4·3이 전하는 평화의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고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설명했다. 1년에 1600만명 이상이 제주를 방문하는 시대, 제주는 이윽고 제 상흔을 세상에 드러냈다. 4·3은 무엇인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2000년 제정된 ‘제주 4·3 특별법’의 정의다. 특별법에 따르면 4·3에는 두 개의 모습이 있다. 해방 직후 첨예했던 좌익(무장대)과 우익(토벌대)의 갈등과, 그 갈등으로 빚어진 양민 학살이다. 4·3의 상처가 여태 아물지 않은 것은 그만큼 억울한 사연이 많았기 때문이다. 4·3에 관한 정부의 유일한 공식기록인 ‘제주 4·3 진상조사 보고서(2003)’는 1948년 당시 제주 인구의 9분의 1수준인 2만5000∼3만명이 4·3으로 희생됐다고 추정했다. 희생자의 33%가 어린이·노인·여성이었으며, 희생자의 86%가 토벌대에 의해 발생했다. 토벌대 전사자는 320명으로 집계됐다. 4·3은 한동안 ‘폭동’ 취급을 받았고, 최근까지 ‘4·3 사건’으로 불렸다. 지금은 ‘제주 4·3’이라고만 한다. 진상 규명이 덜 됐기 때문이다. 4·3은 아직 제 이름을 받지 못했다.
4·3 유적지를 제주 관광지도에 새겼다. 제주도와 4·3평화재단의 도움을 받았다. 지도를 그리다 알았다. 4·3 유적지 대부분이 유명 관광지 곁에 있었다. 사연을 숨긴 명소도 허다했다. ‘유적지 옆 관광지’라는 표현이 무례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고집한다. 여행은 당신의 일상으로 들어가는 일이어서다. 당신의 상처도 어루만지는 일이어서다. 4ㆍ3의 심장
4.3 평화공원 안에 있는 4.3 평화전시관. 벽 그림이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 연작 중 하나인 '한라산 자락 사람들'이다. 전시물의 수준이 높다. 손민호 기자.
4ㆍ3 평화공원은 한라산 동북쪽 자락 거친오름 아래에 자리한 거대한 공원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약 40만㎡ 규모의 묘지공원이다. 공원 복판의 위령탑을 에워싸고 4ㆍ3 희생자 1만4231명의 이름을 새긴 벽이 서 있다. 4ㆍ3 당시 행방불명 된 3895명을 위해 세운 표석은 공동묘지 같다. 절물자연휴양림 가는 길목, 한화리조트 맞은편 중산간에 4ㆍ3 추모사업의 심장이 들어앉아 있다. 70주년 기념행사도 여기에서 열린다.
4ㆍ3 평화공원 광장에 설치된 조각상 ‘비설’. 지난 밤 내린 눈이 아기를 안은 어머니의 등에 소복했다. 조각상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손민호 기자
4ㆍ3 평화공원은 2008년 3월 22일 개관했다. 공원 개장까지 모두 600억원이 들어갔다. 시설은 물론이고 전시물의 수준이 높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광장 어귀에 설치된 조각상 ‘비설(飛雪)’이다. 49년 1월 6일 두 살 젖먹이 딸을 등에 업은 채 토벌대의 총에 맞아 죽은 변병생씨와 아기를 형상화했다. 마침 눈 내린 이튿날 찾아갔다. 아기를 품고 엎드린 어머니의 등에 눈이 소복했다. 4ㆍ3평화기념관 전시관도 꼭 둘러보길 권한다. 92년 발견 당시의 다랑쉬굴을 재현해 놓았다. 제주 4ㆍ3평화재단 양조훈 이사장은 “한해 평균 25만명이 평화공원을 방문한다”고 소개했다. 의외로 방문객이 많아서 놀랐다. 4ㆍ3 평화공원이 들어선 자리가 해발고도 430m다. ‘번영로’라 불리는 97번 지방도로에서 4.3㎞ 안으로 들어오면 공원 입구다. 공원을 들르는 노선버스 번호도 43번이다. 버스 번호만 빼고 다 우연이란다. 입장료 없음. 슬픈 비밀
우뭇개 언덕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 성산일출봉도 4.3 당시 악명 높은 처형장이었다. 손민호 기자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에는 슬픔이 배어있다. 제주의 이름난 풍광 뒤에는 4ㆍ3의 참상이 숨어있다. 놀라지 마시라. 당신이 아는 제주 명소 대부분이 4ㆍ3 유적지다. 이를테면 제주의 관문 제주국제공항은 4ㆍ3 최대의 학살터였다. 공항 일대 정뜨르는 일상적으로 총살이 집행되던 현장으로, 활주로 옆에서 2006∼2011년 발굴작업에서만 유해 388구가 나왔다. 제주 제1경 성산일출봉도 악명 높은 처형장이었다. 성산일출봉 오른쪽의 우뭇개 언덕과 왼쪽의 터진목은 성산읍 성산리 사람들이 수시로 끌려나와 총살 당한 터였다. 제주민속촌과 해비치리조트가 들어선 표선 백사장 일대 한모살은 표선면 가시리ㆍ토산리 사람들이 쓰러진 장소다. 가시리에서는 최소 501명이 목숨을 앗겼고, 토산1리에서는 성인남자가 1명만 살아남았다.
송악산 뒤편 알뜨르 벌판은 4.3에 관한 가장 딱한 사연을 간직한 유적지다. 멀리 산방산이 내다보이는 알뜨르는 제주 최대의 감자 산지다. 손민호 기자
가장 참혹한 현장 중 하나가 송악산 뒤편 섯알오름 주변의 알뜨르다. 50년 국군은 주민 210명을 예비검속이란 명목으로 일제 검거했다. 그리고 한밤중에 모두 총살했다. 한 명씩 웅덩이에 던지고 출입을 막았다. 그리고 7년이 흘렀다. 유족이 시신을 수습하려고 했으나, 살은 문드러졌고 뼈는 엉켜 있었다. 누구의 유골인지 알 수 없어 유골을 가리지 못했다. 결국 두개골과 등뼈 하나씩 짝을 맞춰 한 벌의 유골을 갖춘 뒤 봉분 한 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뼈를 맞춰 모두 132기의 무덤을 조성했다. 그 묘지가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다. 조상은 백 명 자손은 하나인 무덤이란 뜻이다. 알뜨르는 제주 최대 감자 산지다. 잃어버린 마을
서우봉에서 내려다본 함덕 해변. 이 고운 풍경은 그러나 4.3과 관련한 가장 끔찍한 기억을 숨기고 있다. 서우봉 너머가 하룻밤만에 애먼 340명이 숨진 북촌리다. 손민호 기자
48년 10월 17일 국군 9연대장 송요찬은 “해안으로부터 5㎞ 이상 떨어진 지역을 출입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무조건 사살한다”는 내용의 중산간지역 소개령을 발표했다. 11월 17일에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그해 겨울 섬에서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가장 끔찍한 사건이 조천읍 북촌리에서 발생했다. 제주 최고의 해변으로 꼽히는 함덕 해변 옆마을이다. 49년 1월 17일 마을 어귀에서 토벌대 2명이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숨졌다. 토벌대는 북촌리 주민 모두를 북촌초등학교에 집결시킨 뒤, 주민을 20명씩 묶어 인근 옴팡밭(움푹 팬 밭)에 끌고가 죽였다. 이날 하루에만 북촌리 주민 340명이 죽었다. 그날 이후 북촌리는 무남촌(無男村)이 됐다. 음력 섯달 열여드렛날이 돌아오면 마을에선 숨죽인 곡성이 터져나왔다. 그 애끊는 사연이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낳았다.
4.3 평화전시관은 92년 발굴 당시의 다랑쉬굴 내부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모두 11명의 유골이 발견됐으며 토벌대가 동굴 입구에서 피운 연기에 모두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손민호 기자
4ㆍ3을 거치며 중산간마을 109개가 사라졌다. 대부분 토벌대가 불태워버렸다. 영화 ‘지슬’의 배경이 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도 그렇게 사라졌다. 무등이왓 주민들은 인근 큰넓궤(‘궤’는 작은 동굴)에 두 달을 숨어 살다 토벌대에 발각돼 모두 처형당했다. 무등이왓 주민 중 최소 40명이 정방폭포까지 끌려가 죽었다. 후손들이 만든 헛묘가 주인 잃은 마을 주변에 있다. 다랑쉬오름 아래 다랑쉬마을과 다랑쉬굴, 선흘곶자왈 안의 목시물굴에 어린 사연도 다르지 않다. 모두가 용서한다
사려니숲길. 이 평화로운 숲에도 4.3의 흔적이 숨어있다. 손민호 기자
사려니숲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 중 하나다. 여기에도 4ㆍ3의 흔적이 숨어있다. 숲길 입구에서 1㎞쯤 들어가면 오른편으로 오솔길이 이어진다. 평소에는 출입을 제한하지만 4ㆍ3평화재단의 도움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취재에 동행한 오승국 기념사업팀장이 “4ㆍ3 유적지 중에서 가장 접근이 어려운 곳”이라고 소개했다. 눈밭을 헤치고 숲 안으로 1.2㎞쯤 들어가니 마침내 ‘이덕구 산전(山田)’이 나타났다. 49년 6월 7일 무장대장 이덕구가 최후를 맞은 장소다. 당시 무장대가 썼던 솥단지가 녹 슬고 깨진 상태로 놓여 있었다. 4ㆍ3은 이덕구가 죽으면서 사실상 끝났다.
이덕구 산전의 녹 슬고 깨진 솥단지. 무장대가 갖고 다녔던 유물이다. 원래는 2개가 있었는데 1개가 사라졌다. 사려니숲 깊숙이에 숨어있다. 손민호 기자
한라산 자락에는 토벌대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있다. 이를테면 군경 주둔소가 있다. 무장대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설치한 참호시설로, 제주에는 모두 32개 주둔소가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한라산 둘레길 동백길 구간에 있는 시오름 주둔소다.
하귀리 영모원. 제단 왼쪽부터 독립운동가, 참전군인, 4.3 희생자의 비석이 차례로 놓여있다. 하귀리 주민이 주민 모금으로 만든 화해의 공간이다. 손민호 기자
가장 뜻깊은 유적은 애월읍 하귀리에 있는 영모원(英慕園)이다. 부침 심한 현대사를 겪으며 마을이 갈라지자 하귀리 주민들은 모든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간을 짓기로 뜻을 모은다. 그리고 오로지 주민의 갹출로 2억원을 만들어 독립운동가, 참전군인, 4ㆍ3 희생자를 한자리에 모시는 영모원을 2003년 조성한다. 요즘도 설 연휴마다 주민들이 위령제를 올린다. 비문에 새긴 글귀가 절절하다.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 그래, 우리 모두가 희생자고 죄인이다.
[출처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