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기타)/History of man (인물사)

장준하

2018. 2. 3. 11:09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12) 장준하(1918~1975)

자유당·군사정권에 사상계 창간으로 맞섰던
불같은 성격의 호랑이

애수 어린 두 눈으로 가끔 말하곤 했다

'난 김 박사가 부러워… 가족이 없으니 걱정거리가 없지 않소'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12) 장준하(1918~1975)
일러스트=이철원

장준하는 '돌베개'라는 자서전의 저자다. 일제 말기 학도병에 끌려간 애국 청년이었던 그는 중국에 주둔하던 일본 군대에서 훈련을 받다가 탈영, 광복군이 주둔한 중경(충칭) 땅을 찾아 먼 길을 떠났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발바닥에는 온통 물집이 생겼지만 마침내 중경으로 피란 가 있던 임시정부를 찾는 데 성공했다. 보통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 뒤 마침내 뜻을 이룬 것이다. 장준하는 임정 주석 김구와 함께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다.

장준하는 1918년 평안북도 의주의 개신교 목사 아들로 태어나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그의 아버지가 선천에 있는 신성중학교 교목(校牧)이 되자 아버지를 따라 그 학교에 진학했다. 모든 기독교 계통 교육 기관의 신사 참배가 강요됐을 때 그의 아버지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교목직을 사퇴했다.

그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장준하는 성장했다. 그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 있던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숭실전문 또한 신사 참배 거부로 폐교돼 정주의 한 소학교 교사로 부임해 3년 동안 그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장준하는 일단 일본에 있는 동양대학에 진학해 예과를 마치고 일본신학교에 입학했다. 해방을 일 년 반쯤 앞두고 장준하는 학병으로 소집돼 중국 주둔 일본군 제65사단에 배속됐는데 그해 7월 중국 강소성(장쑤성) 서주에서 탈영했다.

학병으로 입대할 때부터 장준하는 광복군에 가담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광복군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일본군에게 발각될까 봐 걸어서 광복군을 찾아간 것이다. 그 거리가 얼마나 됐을까.

그때부터 장준하는 정치 현장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정부가 수립된 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사상계'를 창간하면서부터였다. 사상계는 자유당의 장기 집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이 나라 지식층에 용기를 심어주던 유일한 잡지로, 매달 10만부가 판매될 만큼 성장했다. 함석헌을 비롯해 안병욱·이극찬 등 일류 필진이 매달 그 잡지에 기고하며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사상계가 4·19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가 성공해 군사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그 정권과 맞서 정면으로 싸우는 언론은 오직 사상계 하나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상계만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장준하도 전국적 인물이 됐다. 특히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시대의 영웅처럼 추앙됐던 것도 사실이다.

정치적 감각이 예리하던 장준하는 대통령의 꿈을 품고 있었다. 박정희가 마련한 새 헌법에 반대하기 위한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는 가운데 천관우·계훈제·법정·김동길 등과 함께 '백만인 개헌 서명운동'에 착수했다. 그 운동은 뜻하지 않게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나는 장준하에게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고 연막을 치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권고했지만, 장준하는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라 빨리 군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곧 백만인 서명운동이 끝나게 되었다"고 선언을 해버렸다. 겁을 먹은 당국이 방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이 나누어 서명을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중앙정보부원이 덮쳐 서명한 서류를 몽땅 압수해 갔다. 결국 백만인 서명운동은 수포로 돌아갔다.

부완혁이 곤경에 빠진 장준하로부터 사상계를 인수했는데, 사상계에 실린 시 '오적' 때문에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된다. 유독 사상계가 게재를 허락한 김지하의 '오적'은 국민감정의 단적인 표현이었다. 일반 국민은 그 시를 읽고 '옳거니'를 연발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입장에선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사상계를 좌절케 할 좋은 기회를 포착한 셈이었다. 부완혁의 능력만으로는 사상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장준하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던가. 구름 타고 왔다 구름 타고 떠난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가까이 지내면서 장준하에게는 보통 사람에게 없는 신들린 일면이 있었다고 나는 증언하고 싶다. 그는 자유당의 장기 집권에 맞서고 박정희의 군사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언론 사상계의 총수였는데, 범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면을 가지고 살다 홀연히 떠난 불운한 사나이였다고 할 수도 있다. 그가 1975년 8월 17일 아침 일정에는 없던 등산길에 오른 것은 두 청년의 권고에 못 이겨서였다.

한평생 산을 잘 타기로 소문났던 장준하가 높지도 않은 산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당국은 추락사로 판정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사인을 거론하지 못하게 했지만, 아무런 외상도 없이 강철같이 단단하던 사나이가 어찌 시신이 되어 우리 품에 돌아왔단 말인가. 그를 유인하다시피 등산을 강권했던 젊은 친구들은 영영 자취를 감췄고 끝까지 증언할 수 있는 목격자도 없이 구름 타고 가버린 사나이 장준하. 장준하의 부인과 아들 딸들은 세끼 밥을 먹기도 어려운 형편에서 아들은 대학 문턱에 가보지도 못하고 세파에 시달리며 오늘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다정다감했던 장준하가 가족에 대한 걱정을 안 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는 가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김 박사가 부러워. 가족이 없으니 걱정거리가 없지 않소." 호소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의 맑은 두 눈에는 애수가 서려 있었다. 40여년이 지난 오늘도 그 표정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출처 : 조선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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