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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2017. 9. 16. 20:57

복직후 달라진 이순신, 선조 향해 망궐례 한차례도 안해

 

[토요기획]잊혀진 전쟁 ‘정유재란’<11> 
11화: 이순신의 ‘조선 수토’ 대장정①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1597년 8월 3일 손경례의 가옥(진주시 수곡면 원계리)에서 그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는 선조의 유서를 받들었다.
“맑음. 이른 아침에 뜻밖에 선전관 양호가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를 가져왔다. 유지 내용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숙배(肅拜)한 뒤에 삼가 받았다는 서장을 써서 봉해 올렸다.”(‘난중일기’) 

1597년 8월 3일 이순신은 진양(진주)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의 사랑채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직첩을 다시 받았다. 그해 4월 1일 한양의 의금부에서 풀려나 백의종군을 한 지 꼭 4개월 만의 복직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왜군에게 전멸당했기 때문이었다.

다급해진 선조와 대신들은 이순신 복귀 외에 대안이 없었다. 이순신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선조는 유서에서 “근자에 경을 직책에서 물러나게 하고 죄를 지은 채 종군하도록 처벌한 것은 사람(선조)의 꾀가 두텁지 못한 데서 비롯된 일”이라고 사과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패배의 욕됨에 이르렀으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尙何言哉)!” 하면서 ‘상하언재’를 반복했다. 특히 선조는 “특별히 경을 상중(喪中)임에도 일으켜 세운다”고 강조했다. 이순신이 모친상을 이유로 직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조선의 관리들은 부모상을 당하면 벼슬을 내려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는 관례이자 원칙처럼 준수됐다. 임금이 관직 제수 명령을 내려도 신하가 떳떳하게 거부할 수 있었고, 임금도 어쩌지 못했다.  

당시 이순신은 어머니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백의종군 중이었다. 전라좌수영(여수)에 머물던 어머니 변씨가 옥중의 아들이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83세의 노구를 이끌고 배편으로 아산으로 올라오다가 병이 들어 선상에서 숨진 게 4월 13일이다. 이순신이 고향 아산집에 어머니의 시신을 남긴 채 금오랑(金吾郞·의금부 도사)의 독촉에 못 이겨 남쪽으로 길을 떠난 건 4월 19일의 일이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려다가 이미 죄가 여기에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를 하고자 하였으나 어버이 또한 돌아가셨구나.”(이분의 ‘충무공행록’)

 
대성통곡하며 길을 나선 이순신은 공주-여산-전주-임실-남원-운봉-구례-순천-하동을 거쳐 합천에 당도했다. 오늘날 서울에서 출발하는 전라선과 엇비슷한 노선인 1600리(640km) 길이었다. 

그렇게 ‘백의종군의 길’을 나선 지 3개월 만인 7월 18일 새벽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 참패 소식을 들었다. 감옥에서 상했던 몸이 덧날 정도로 큰 충격과 상실감에 시달렸다. 수군이 전멸한 상황에서 왜적의 총칼로부터 더 이상 조선을 지켜낼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날 낮 이순신이 머물던 민가로 권율이 찾아왔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쩌겠소.”(‘난중일기’)

권율은 더 이상의 말은 아꼈다. 결국 깊은 시름에 잠겨 있던 이순신은 “내가 직접 연해 지방에 가서 듣고 본 뒤에 결정하겠다”(‘난중일기’)며 송대립, 이희남 등 전라좌수군 출신의 군관 9명과 병사 6명만 데리고 길을 떠났다. 권율의 비공식 참모 자격으로 남쪽 연해안으로 달려가 피해 상황을 확인하며 대책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인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 직첩을 다시 받은 것이다. 

상중과 조선수군 궤멸이라는 상황 속에서 이뤄진 이순신의 복귀는 정유재란의 흐름을 180도 바꿔놓는 결정적 전환점이 된다. 당시는 왜군이 칠천량 해전 승리 이후 영호남 내륙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상황이었다. 세계전쟁 사상 비근한 예를 찾기 힘들 잔혹한 양민 학살이 시작되던 시점이기도 했다.

결국 그 후 이순신은 전사(戰死)하는 날까지 16개월에 걸쳐 불꽃같은 삶을 살며 임진왜란에 이어 다시 한번 무너져 내리던 조선의 운명을 건져 올린다. 최근 일각에서는 이순신이 과대 포장됐다는 주장을 편다. 1960년대 군사 정권이 이순신을 의도적으로 영웅화시켜 권력 강화에 이용했다는 주장이다. 그런 공방의 결론을 미리 내리기보다는 이순신을 역사적 사실 그 자체로만 파고들어가 보면 대답은 분명하게 나올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이순신을 놓친 왜군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이순신은 수군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선 호남에서 병력과 전선(戰船)의 확보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순신은 진주 손경례의 집에서 출발해 밤을 새워가며 호남 쪽으로 달려갔다. 

당시 전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미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선인 섬진강변은 왜선들로 가득 찼다. 8월 2일 왜선들은 섬진강 입구에 도착해 있었고(‘조선일일기’), 8월 6일에는 왜선들이 북상해 하동 악양까지 올라와 정박해 있었다. 남해 바다로부터 50∼60리 사이에 왜선이 가득 차서 마치 바다가 물이 없는 듯했다.(‘난중잡록’)

게다가 육로로도 일본 육군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이순신이 진주에서 삼도수군통제사 교서를 받던 8월 3일, 진주 인근의 밀양, 김해, 진해, 거제의 길은 왜군들로 인해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이순신이 교서를 받드느라 진주에서 하루이틀 더 머물렀다면 꼼짝없이 시마즈 요시히로 군에게 포위당할 뻔했다. 왜군 중에서 가장 부대 이동이 빠르기로 소문난 시마즈 군이 5일 진주와 섬진까지 진격해왔기 때문이다.(‘난중잡록’)

이순신은 밤을 새워가며 말을 달려 8월 4일 날 샐 무렵 하동 두치(현재 두곡마을)의 섬진강변에 이르렀다. 그러나 강을 건너 바로 호남의 순천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왜군 구로다 나가마사 군이 하동과 순천 사이의 광양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던 듯하다. 이순신은 대신 북상해 석주관을 거쳐 8월 4일 저녁 나절에 구례현에 도착했다.  

구례는 텅 비어 있었다. 일본군이 몰려온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미리 산속 등지로 도피해버렸다. 이순신은 구례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5일 더 북상해 곡성으로 향했다. 바로 그 이틀 뒤인 7일 왜군은 이순신이 북상했던 길을 그대로 밟아 구례까지 들어와 점령했다. 구례현 안팎이 모두 폐허로 변했다. 왜군들은 이순신의 존재를 모른 채 이순신의 뒤를 쫓는 ‘기묘한’ 행보를 했던 셈이다. 당시 왜군들은 조선 수군이 전멸했다고 판단해 수군과 이순신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게 천만다행이라고나 할까.

이순신을 따라나선 백성들  

이순신이 도착한 곡성 역시 관사와 마을이 비어 있었다. 곡식과 물자를 모두 파기해버리는 조선 조정의 청야책(淸野策)이 이순신을 곤혹스럽게 했다. 군량미와 무기 등 물자를 확보할 수 없었다. 6일 곡성 옆의 옥과에 이르니 피란민이 길에 가득했다. 순천과 낙안, 구례에서 왜군을 피해 온 백성들은 길에 쓰러진 이들을 서로 부축해가며 걷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눈물을 흘렸다.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우리들은 이제 살았습니다.”(‘난중일기’)

이순신을 알아 본 피란민들이 울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회화나무 정자(大槐亭) 앞에 피란민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순신은 말에서 내려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이순신은 피란민 사이를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옥과현청으로 향했다. 그의 종사관이었던 정사준과 호위군관 출신의 정사립 형제가 마중 나왔다. 임진왜란 초기부터 함께 해전을 누비며 한산대첩 당시 거북선 돌격장을 맡았던 이기남도 순천에서 찾아왔다. 조응복, 양동립 등도 합류했다. 피란민 가운데 젊은 장정들도 수군에 들어오겠다며 자발적으로 찾아왔다. 장정들은 처자에게 “대감이 오셨으니, 이제 너희는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대감을 따라가겠다”며 결의를 다졌다.(이분의 ‘충무공행록’)

이순신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군관 9명과 병사 6명으로 시작한 이순신의 군대는 옥과를 떠나 순천에 도착할 무렵에는 60여 명의 장졸로 불어났다. 이순신의 얼굴에서 모처럼 여유와 자신감이 묻어났다. 이제는 무기와 전선 확보가 문제였다.

이순신이 진정으로 섬긴 대상은? 

1597년 7월 16일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전멸한 상황에서 이순신이 군사들을 점검하고 말을 달리던 군사훈련유적지. 속칭 ‘진배미’ 훈련장(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으로 불리는 이곳은 ‘난중일기(1597년 7월 29일)’에 상세히 묘사돼 있다. 진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이순신이 자신을 하옥시키고 죽음 직전까지 내몬 선조의 복직 명령을 순순히 받들고, 이미 전멸상태인 수군 재건에 혼신의 힘을 다한 근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임금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 때문만은 아니었음이 문헌에서 확인된다. 이순신은 의금부 감옥에 갇힌 이후 편견과 의심으로 가득한 선조에 대해 예전과 달리 생각했다는 게 ‘난중일기’에서 엿보인다.  

이순신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1596년 12월까지 매달 초하루 아니면 보름에 망궐례(望闕禮)를 그르지 않고 행해 왔고 이를 일기에 반드시 남겼다. 망궐례는 외직에 있는 신하가 새벽에 일어나 임금이 있는 궁궐 방향을 향해 절을 하는 행사였다. 일종의 충성을 다짐하는 의례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통제사로 복직한 이후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사망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망궐례를 치렀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 전 임금의 제삿날은 일기에서 챙기면서도(‘난중일기’ 1597년 7월 1일 인종의 제삿날), 현 임금에게 충성을 다지는 행위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순신이 역심(逆心)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순신은 중국 역사서인 ‘송사(宋史)’를 읽고 “신하가 몸을 던져 임금을 섬겨야 하는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다”는 독후감을 남겼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8일)  

무신이면서 문신 성향이 강했던 이순신은 틈날 때마다 역사서를 읽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읽어보니 개탄스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난중일기’ 1596년 5월 25일)고 했다. 또 다른 기록도 있다. “새벽에 진을 한산도(韓山島) 망하응포(통영 하포리)로 옮겼다.”(‘난중일기’) 

이순신은 1593년 6월 21일, 전라좌수영 진영을 한산도로 옮겼다. 이 특별한 날, 그는 일기에서 한산도를 ‘韓山島’라고 표기했다. 이순신은 평소 한산도를 ‘閑山島’ 혹은 ‘閒山島’로 표기했지만, 초서로 기록한 이 날짜 일기에서는 ‘한’을 ‘韓’으로 명기했다. 이를 단순한 오기로 볼 수 있다(노승석의 ‘교감완역 난중일기’). 그러나 이를 의도적인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임진왜란과 이순신 연구가인 일본 학자 기타지마 만지(北島万次)는 “이순신이 ‘韓’으로 기록한 것은 삼한(三韓)을 가리키는 의미”(‘豊臣秀吉の朝鮮侵略’)라고 해석했다.  

이 같은 이순신의 역사 인식은 조선 개국 이래 면면히 내려온 ‘삼한 수토(搜討)의 정신’과도 맥을 같이한다. 수토는 ‘찾아서 구하다’ ‘탐구하여 연구하다’ ‘뒤져서 정벌하다’ 등 여러 의미가 중첩된 표현이다. 요약하면 내 땅을 지키고 수호하는 행위다. 조선의 식자층은 선대의 유적지, 신비로운 기운이 서려 있는 길지(吉地), 바다의 수호신인 섬 등을 살피고 지키는 행위를 “수토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를 대단한 영예로 생각했다. 그들에게 조국의 영토는 왜구나 오랑캐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신성하고도 신령한 것,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谷)의 땅이었다. 지리적 개념을 넘어서는 차원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해상 전투를 도왔던 어영담은 “영남 바다를 샅샅이 ‘수토’해 바다의 얕고 깊음과 도서의 험하고 수월함 등을 가슴 속에 그릴 정도였다”고 썼다.(‘난중잡록’)

수토의 전통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각지의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왜군은 관군이 아닌 민간인들이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에도 수토 전통은 유림들 사이에서 면면히 계승됐다. 1693년 안용복이 민간인 신분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침범한 왜구들을 격퇴한 것도 이 같은 전통의 맥락이다. 이후 조선 조정은 수토사(搜討使)라는 관리를 임명해 울릉도와 독도를 정식으로 지키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