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일기 2 / 이해인
1
"넌 그때 왜 그랬니?
온 식구가 찾아 헤맨 끝에 보니
어느 골방에서 배시시 웃으며
걸어 나오더구나. 쬐끄만 애가 말이야"
어린 시절
함께 지내던 고모님이
어느 날 불쑥 던지신 이야기 속으로
문득 걸어 나오는 다섯 살짜리 아이
조그만 크기의 라디오 하나 들고
아무도 없는 구석방에 들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원리를 캐내려고
꽤나 고민했다
작은 라디오 안에
어떻게 큰 사람이 들어가서
말을 하고 있는지
하도 신기하고 경이로워서
밥도 굶고 앉아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
하루에도 몇 번씩
서랍을 열 때마다
문득 그리워지는
내 유년의 비밀서랍
비밀도 없는데
비밀서랍을 만든 것은
누군가 봐주길 바라는
허영심 때문이었을까?
인형의 옷을 해 입힐
색종이와 자투리 헝겊
미래의 꿈과 동요가 적힌
공책과 몽당연필이
가득 들어찼던
내 어린 시절의 서랍은
어둠조차 설레임으로 빛나던
보물상자였는데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내 서랍 속엔
쓸모없는 낙서와 먼지
내가 만든 근심들만
수북이 쌓여 있다
3
하루 종일
종이인형을 만들며
함께 꿈을 키우던
동그스름한 얼굴의
소꿉친구가 그리운 날
노오란 은행잎을
편지 대신
내 손에 쥐어주던
눈이 깊은 소년이
보고 싶은 날
나는 색종이 상자를 꺼내
새를 접고
꽃을 접는다
아주 작은 죄도
지을 수 없을 것 같은
푸른 가을날
가장 아름다운 그림 물감을
내 마음에 풀어
제목 없는 그림을
많이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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