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는 뮤지컬영화를 통해 음악과 영화와 로스앤젤레스를 예찬한다. 판시네마 제공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작은 정사각형 흑백영상이 스크린에 잠시 머물다가 컬러 와이드 화면으로 갑작스레 확장된다.
이 영화는 크게 봐야 제 맛이라는 강조로 읽힌다. 꽉 막힌 자동차전용도로 위 차마다 각기 다른 음악이 흐르다가 차 속 한 여자가 노래를 부르면서 영화는 판타지로 빠져든다. 차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노래를 이어 받으며 군무를 펼치는 장면은 왜 이 영화가 와이드 화면을 매개체로 택했는지 뚜렷이 드러낸다.
‘라라랜드’는 뮤지컬영화다. 노래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결말까지 이어지며, 춤이 추임새 역할을 한다. 뮤지컬영화의 전성기는 20세기 전반기였다. 이제는 주류에서 밀려난 뮤지컬영화를 스크린에 소환하면서 ‘라라랜드’는 뮤지컬의 전설들을 활용한다. 여러 영화들을 인용하며 ‘꿈의 공장’ 할리우드를 품은 도시 로스앤젤레스(약자 LA는 계명 라와 똑같다. ‘라라랜드’는 로스앤젤레스라는 꿈의 나라를 의미하기도 한다)를 예찬한다.
'라라랜드'의 도입부 역동적인 군무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떠올리게 한다. 판시네마 제공
뮤지컬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은근한 오마주 그래서 더 고급스러운
이야기는 얼개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 연기에 대한 꿈을 키우며 6년째 오디션을 전전하는 무명배우 미아(엠마 스톤)와 정통 재즈의 길을 가고 싶어하는 고독한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의 사랑을 그린다. 세상이 받아들이진 않는 열정 탓에 가슴앓이하던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이루고 꿈에 다가가는 과정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감독은 이야기로 감정의 진폭을 키우기보다 노래와 춤과 영상기술에 기대 정서적 호응을 기대한다. 뮤지컬영화 황금기에 찬연히 빛났던 영화들을 오마주하며 관객을 유혹한다.
‘라라랜드’는 여러 영화들을 오마주하되 노골적이지 않고 은근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 파티장에서 우연히 재회한 미아와 주차된 차를 찾아 함께 걷던 세바스찬은 가로등 기둥을 잡고 손과 발을 벌린다. 기둥을 도는 큰 몸짓까지는 안 해도 고전 뮤지컬 영화 ‘싱잉 인 더 레인’(1952)의 저 유명한 장면(빗 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추던 진 켈리가 가로등 기둥을 잡고 도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두 사람이 가볍게 탭 댄스를 출 때 고전영화 팬이라면 배우 진저 로저스와 프레드 아스테어의 하모니가 빛나는 ‘탑햇’(1935) 등을 연상하게 된다. 뮤지컬영화에 대한 헌사는 프랑스영화 ‘쉘부르의 우산’(1964)으로까지 이어진다. 파티장을 찾았다가 차가 견인된 사실을 알고 인적 드문 밤길을 걷는 미아의 모습은 ‘쉘부르의 우산’의 쥐느비에브(카트린 드뇌브)와 포개진다.
고전 뮤지컬영화에 대한 인용은 짧아서 오마주가 아니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도입부의 역동적인 군무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를 떠올린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나, 무관하다 해도 맞다(영화 제작진과 배우들은 ‘싱잉 인 더 레인’과 ‘탑햇’ ‘스윙 타임’ ‘밴드웨건’ 등을 관람했다고 한다).
영화 '탑햇'의 진저 로저스(왼쪽)와 프레드 아스테어는 '라라랜드'의 미아와 세바스찬에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고전 뮤지컬영화 '싱잉 인 더 레인'.
뮤지컬영화가 아닌 ‘이유 없는 반항’(1955)은 아예 한 장면을 등장시킨다. 미아와 세바스찬이 고전영화 상영관 리알토에서 데이트를 하며 보는 영화가 ‘이유 없는 반항’인데 영화 상영 중 필름이 불타면서 관람은 중단된다(이 장면은 ‘시네마천국’을 떠올린다). 대신 두 사람은 ‘이유 없는 반항’ 속 장소인 그리피스천문대를 찾아간다. 방황하는 청소년 짐(제임스 딘)이 전학 간 학교의 불량한 패거리들과 싸움을 벌이는 그리피스천문대에서 미아와 세바스찬은 춤과 노래로 밀어를 속삭인다. 뮤지컬영화들은 ‘찔끔 인용’하면서 ‘이유 없는 반항’의 경우 영화 속 장소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며 오마주한다. 뮤지컬영화에 대한 헌사는 짧게, 극영화에 대한 인용은 길되 다른 방식으로 차별화한다. 이중적인 전략인 셈이다. 굳이 옛 영화들을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고전의 향기에 기댄다.
'라라랜드'는 로스앤젤레스의 재즈 명소 라이트하우스 카페를 영화 속 주요 공간을 활용한다. 판시네마 제공
'라라랜드'는 세바스찬과 미아의 데이트를 매개로 로스앤젤레스의 풍광을 포착한다. 판시네마 제공
음악과 영화와 LA에 바치는 영상 헌시
‘라라랜드’를 이해하기 위해선 감독 데이미언 셔젤(31)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미국 동부에서 나고 자란 셔젤은 어려서부터 영화를 꿈꿨다. 영화에 빠져 살다 음악을 접했고, 곧 음악을 삶의 목표로 삼았으나 재능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다. 음악에 미쳐 밴드부 활동을 하던 셔젤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의 전작 ‘위플래쉬’에 녹아있다. ‘위플래쉬’가 꿈을 향한 광기를 묘사했다면, ‘라라랜드’ 꿈을 둘러싼 낭만과 낙담, 체념 등 다채로운 감정들을 리듬에 싣는다.
셔젤 감독은 ‘위플래쉬’에 이어 ‘라라랜드’에서 재즈를 스크린 중심에 세운다. ‘위플래쉬’의 냉혈 교수 플레처(J. k. 시몬스)는 재즈의 순수함을 강조한다. 스타벅스에서 틀어주는 음악만 재즈로 받아들이는 대중을 경멸한다. 플레처 교수의 생각은 세바스찬이 이어받는다. 세바스찬은 정통 재즈 뮤지션들이 연주하던 바가 브라질 음악 삼바를 들려주고 스페인 음식 타파스를 파는 괴이한 곳으로 바뀌자 분노한다. 그의 꿈은 정통 재즈를 들을 수 있고 자신이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바를 운영하는 것이다.
LA에 대한 헌사도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다. 셔젤은 고교 졸업 뒤 자신의 옛 꿈이었던 영화로 삶의 목표를 선회한다. 하바드대학에 진학해 영화를 공부하고 졸업 뒤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업계에 뛰어든다. 어려서부터 영화를 열망했던, 그래서 할리우드를 동경했을 그는 ‘라라랜드’에서 LA를 예찬한다. 세바스찬과 미아가 제대로(!) 된 재즈를 듣기 위해 찾아가는 곳은 허모사 해변의 라이트하우스 카페다. 1954년 문을 연 재즈 카페로 LA의 명소다. 두 사람이 ‘이유 없는 반항’을 관람하는 극장 리알토는 1917년 문을 연 곳이다. 그리피스천문대 등 여러 영화들의 배경이 됐던 LA의 아름다운 풍광들을 포착하며 감독은 연심을 드러낸다. 요컨대 ‘라라랜드’는 음악과 영화와 LA에 대한 뜨거운 사랑 고백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