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중앙일보] [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39) 닭 울음 소리에 베드로가 통곡한 진짜 이유는?
예수는 올리브 산의 겟세마네에서 체포됐다. 성전 경비병들은 밧줄로 예수를 묶었을 터이다. 손을 묶었을까, 몸을 묶었을까. 예수는 꽁꽁 묶인 채 올리브 산의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그리고 언덕길의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해 가야파 대사제의 관저로 끌려갔다. 나도 그 길을 따라서 걸었다. 예수는 외로웠으리라. 제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예수가 겟세마네의 바위에 엎드려 기도할 때 잠에 떨어진 제자들. 그들은 예수가 체포되자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심지어 ‘가장 나이가 어린 제자는 몸에 두르고 있던 천까지 내던지고 알몸으로 도망쳤다’고 성경에 기록돼 있다. 한 패거리로 연루되는 걸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오직 베드로만이 멀찍이 떨어져 끌려가는 예수의 뒤를 따랐다.
성 베드로 교회의 벽에 있는 조각. 횃불과 창과 채찍을 든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를 체포해 끌고가고 있다.
예수는 혼자였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칼과 몽둥이, 그리고 횃불을 든 적들만 있었다. 그러니 외롭지 않았을까. 갈릴리와 사마리아, 유다 광야와 예루살렘을 누비며 “스승님”이라 부르고 따르던 제자들이 모두 도망쳤다. 제사장 가야파의 관저에서는 최고 의회가 소집됐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 율법학자들까지 모였다. 예수에 대한 심문이 시작됐다. 베드로는 이 광경을 보려고 몰래 안뜰로 들어가 시종들 사이에 앉았다. 그리고 불을 쬐었다.
성전의 사제들은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 했다. 그걸 위해 증거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신성 모독’에 대한 증언을 찾아야 했다. 종교 국가인 유대에서 그보다 큰 죄는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불리한 증언들이 이어졌다. 대부분 거짓 증언이었다. 증언들은 서로 앞뒤가 안 맞았다. “사람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한 예수의 발언도 문제 삼았다. 그들은 예수의 말에 담긴 ‘깊은 뜻’을 깨닫지 못했다. 그저 겉으로 나타난 문자적 표현만으로 시비를 걸었다. 예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제사장 가야파의 관저에서 한 하녀가 베드로에게 “당신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죠?”라고 묻자 베드로가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부인하고 있다.
‘베드로가 불을 쬐었다’는 구절이 복음서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날 밤은 차가웠다. 낮에는 햇볕이 따갑지만, 밤이 되면 순식간에 쌀쌀해진다. 그게 이스라엘의 사막 기후다. 더구나 유월절 이튿날 새벽이었다. 그처럼 차갑고 냉랭한 공기 속에서 예수는 재판을 받았다. 생각만큼 진도가 안 나가자 대사제 가야파가 직접 나섰다. 그가 예수에게 말했다. “내가 명령하오. 살아 계신 하느님 앞에서 맹세를 하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인지 밝히시오.” 가야파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말이다.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에게 하녀들이 물음을 던지고 있다. 뒤편으로 체포돼 끌려가는 예수가 보인다.
가야파의 질문은 양날의 칼이었다. ‘메시아’는 유대의 왕이자 구원자다. 예수가 “예스(Yes)”라고 답하면 로마에 대한 반역자가 된다. 또 “노(No)”라고 답하면 신에 대한 모독죄가 성립된다. 어느 쪽으로 답을 해도 올가미에 걸려든다. 가야파는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뭔가 달라야 했다. 하늘을 난다든지, 번개를 부른다든지, 놀라운 힘으로 주위를 한순간에 제압한다든지, 뭔가 특별한 징표가 있어야 했다. 그런 힘으로 자신들을 식민지 백성의 처지에서 해방시켜야 했다. 그런데 이방인이 득실거리는 갈릴리 출신의 이 초라한 시골 촌뜨기 젊은이가 신의 아들이라는게, 더구나 자신들이 숱한 세월동안 목이 타게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인가?”라는 가야파의 물음에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복음 26장64절)
가야파 대사제의 관저에 몰려든 유대인들이 “예수가 죽을 죄를 지었다”며 단죄하고 있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예수의 말을 듣고서 가야파는 자신의 겉옷을 찢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이 더 필요한가? 방금 여러분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떤가?” 그러자 의회 구성원들이 말했다. “그자는 죽을 죄를 지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크게 모욕을 당할 때도, 수치심을 느낄 때도, 큰 슬픔에 빠질 때도 자신의 겉옷을 찢었다. 특히 신을 모독하는 행위나 발언 앞에서 자신의 옷을 찢었다. 그렇게 자신이 감정을 표현했다. 그러니 대사제가 군중 앞에서 자신의 옷을 찢는 광경은 상당히 선동적이었다. ‘우두둑!’ 옷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가야파는 예수에게 신성모독의 죄를 덧씌웠다.
나는 가야파의 관저가 있던 골목을 걸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왜 예수를 몰라봤을까. 예수 스스로 “나는 사람의 아들, 아담의 아들”이라고 하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이유가 무엇일까. 유대인들은 ‘그들이 상상하는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이 기대하는 하느님을 믿었다. ‘하느님은 이러이러할 거야,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지고 계실 거야.’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을 바탕으로 그려낸 ‘하느님에 대한 나름의 스케치’가 있었다. 그 또한 우상임을 그들은 몰랐다.
독일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1455~1528) 작 ‘조롱 당하는 예수’.
나는 묻고 싶다. 그건 ‘만들어진 신’일까, 아니면 ‘만들어지기 이전의 신’일까. 예루살렘의 골목길에서 요한복음 1장1절을 다시 펼쳤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렇다. 하느님은 원래부터 그냥 있었다.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미래에도 있다. 시간이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지, 하느님이 시간 안에 종속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신’이다. 사람들은 신을 보지 못한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다. 그래서 자꾸만 빚어낸다. 손에 잡히는 신, 귀에 들리는 신,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든다. 그래서 ‘만들어진 신’이 생겨난다. 그게 바로 우상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역시 우상에 대한 비판이다.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 대해서만 말할 뿐 ‘만들어지기 이전의 신’ ‘본래의 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도킨스는 ‘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벽 너머로 올리브 산이 보인다. 예수는 올리브 산에서 체포돼 예루살렘 도성으로 끌려왔다.
나는 예수가 심문 받던 시각의 ‘가야파 관저’를 묵상했다. 잡혀간 예수가 있고,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었을 터이다. 그 뜰에 있는 사람들은 신을 믿었다. 예수를 포함해 관저에 있던 모든 사람이 신을 믿었다. 다만 ‘만들어진 신’인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신’인가의 차이가 있었다. 그 뜰에서는 예수만 홀로 ‘만들어지기 이전의 신’을 믿지 않았을까. 제사장도, 수석 사제들도, 최고 의회의 원로들도, 뜰에 몰려든 구경꾼들도 다들 ‘만들어진 신’을 믿고 있었다.
예수는 왜 “사람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했을까. 나는 눈을 감았다. 성전이 뭘까. 신을 만나는 장소다. 유대인들은 손으로 지은 성전에서 ‘만들어진 신’을 만나지 않았을까. 예수는 달랐다.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에서 ‘만들어지기 이전의 신’을 만났다. 그러니 예수에게는 사흘조차 긴 시간이다.
만들어진 신은 우상이다. 그건 신의 속성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신을 만날까. 예루살렘 성벽 위로 높이 솟았던 성전일까. 아니다. 예수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한 바로 그 자리가 신을 만나는 자리다. 거기가 성전이다. 그러니 바로 지금이다. 지금 여기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고,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과 장소 말이다. 다시 물어보자. 어디가 성전일까. 우리가 밥 먹고, 버스 타고, 가족을 만나고, 공부를 하고, 놀고, 일을 하고, 친구를 만나는 모든 시공간이다. 거기서 우리는 예수를 만난다. ‘만들어진 예수’가 아니라 ‘본래 있는 예수’를 말이다. 단 한 순간도 우리가 사는 곳을 떠난 적이 없는 ‘신의 속성’을 만난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이슬람 성전이 서 있다. 모세가 하늘에서 받은 십계명 돌판을 모셨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신을 만나는 장소였다.
아무도 그걸 몰랐다. 예수만 알았다. 그러니 “사흘 안에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의 말은 그들에게 ‘신성모독’에 불과했다. 물음이 올라왔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심문하는 그 뜰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누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까. 어쩌면 우리도 ‘예수’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신’을 빚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신을 만나기 위해 성전을 찾는 건 아닐까. ‘내가 만든 신, 내가 만든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예수에서 벗어나는 이들을 향해 “신성모독!”이라며 정죄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 건 아닐까. 대사제 가야파처럼 자신의 겉옷을 찢으면서 말이다. 남들이 들으라고 목청을 더 높이면서 말이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죽을 죄’라고 판정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에게 몰려들었다. 두 손이 묶여 있었을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또 예수의 얼굴을 가린 다음에 주먹으로 때리고서 말했다. 누가 때렸는지 맞혀보라고. 거기에는 ‘신의 아들이라면 그 정도는 맞혀야 하지 않느냐’는 조롱이 깔려 있었다. 마가복음에는 ‘시종들도 예수의 뺨을 때렸다’(마가복음 15장65절)고 기록돼 있다. 그렇게 예수는 구타를 당했다. ‘만들어진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말 그대로 ‘죽일 놈’이었다.
한 하녀가 “이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하자 베드로가 부인하고 있다.
베드로는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지 않았을까. 두 손으로 불을 쬐고 곁눈질하며 예수의 고초를 목격하고 있었을까. 그때 가야파의 하녀가 안뜰 아래쪽에 있던 베드로에게 다가왔다.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마태복음 26장69절) 베드로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당신이 무슨 말 하는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겠소”라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드로가 대문까지 갔을 때 다른 하녀가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이는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그 말을 듣고서 베드로는 겁이 났을 터이다. 자칫하면 사람들에게 잡혀서 예수처럼 심문을 당할 수도 있었다.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라고 예수를 부인했다.
갈릴리 지방은 이스라엘의 북쪽이다. 남쪽인 예루살렘과 달리 갈릴리 특유의 억양이 있었다.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 출신이다. 사투리를 숨길 수는 없었을 터이다. 가령 서울 한복판에서 심한 전라도 사투리나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식이었을까. 그의 ‘갈릴리 악센트’는 주위 사람들의 눈에 확 띄었다. 베드로 뒤에 선 사람들이 “당신은 그들과 한패다. 말씨를 들으니 분명하다”(마태복음 26장73절)며 다가섰다. 베드로는 본능적으로 부인했다. “거짓말이라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며 베드로는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잡아뗐다. 바로 그때 닭이 울었다. ‘꼬~끼~오~!’
엘 그레코 작 ‘눈물을 흘리는 성 베드로’. 허리춤에 찬 천국의 열쇠가 베드로를 상징한다.
그제야 예수의 말이 떠올랐다. “닭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 말이 생각난 베드로는 어땠을까. 복음서에는 ‘베드로가 문 밖으로 나가서 슬피 울었다’(마태복음 26장75절)고 기록돼 있다. 예수가 안에서 매질을 당하고 있을 때, 베드로는 밖에서 슬픔에 겨워 울었다. 그게 ‘베드로의 슬픔’이다. 나는 그 장면을 묵상했다. 우리 모두는 그런 ‘베드로’를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 하루에도 수차례, 아니 수십 차례 ‘내 안의 예수, 신의 속성’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우리도 ‘제2의, 제3의 베드로’가 아닐까. “나는 그를 모르오, 나는 예수를 모르오, 나는 신의 속성을 모르오.” 그렇게 부인하다가 결국 닭 울음 소리를 듣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베드로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 되고, 어느덧 우리의 슬픔이 된다.
1월이었지만 성 베드로 교회에는 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나는 베드로 통곡 교회를 찾아갔다. 예루살렘 성의 남쪽 출입구에서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불과 5분 거리였다. 입구에 팻말이 있었다. 눈길을 끄는 건 그 위에 그려진 닭 한 마리였다. 팻말뿐만 아니었다. 교회의 지붕에는 십자가가 있고, 그 십자가 위에 황금빛 조각이 하나 붙어 있었다. 황금빛 닭이었다. 베드로 통곡 교회의 곳곳에 ‘닭 울음’의 메시지가 울리고 있었다.
베드로 통곡 교회 지붕의 십자가 위에 닭이 한 마리 앉아 있다.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부인과 회개를 상징한다.
통곡 교회 안에는 벚꽃이 만발했다. 1월이었지만 예루살렘에 내리쬐는 한낮의 볕은 꽤 따가웠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에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예수와 베드로, 그리고 제자들이었다. 예수는 왼손 세 손가락을 펴고 있고, 베드로는 그런 예수를 보고 아니라며 손을 내젓고 있다. 그 뒤에는 붉은 볏을 단 닭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교회 출입문에는 예수와 베드로가 새겨져 있다. 베드로 통곡 교회의 곳곳에 ‘닭 울음’의 메시지가 녹아 있다.
교회 안은 아담했다. 가운데 제단이 있고, 그 위에 십자가, 맨 위에는 유대 최고 의회에서 심문받는 예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밧줄에 두 손이 묶인 예수를 향해 유대인들이 아우성치는 광경이었다. 베드로는 그 모든 광경을 목격했을 터이다. 그는 혹독한 두려움을 견디지 못한 채 “나는 그를 모르오”라며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우리도 마찬가지다. 평화의 땅, 안식의 땅, 자유의 땅에서 “이리로 오라”고 손짓하는 예수를 향해 우리는 그저 손만 내젓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당신을 모르오. 나는 그 땅을 모르오. 나는 신의 속성을 모르오”라고 소리치면서 말이다.
베드로 통곡 교회의 내부. 제단 정면에 묶여서 심문을 받고 있는 예수가 그려져 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호텔 숙소에 있을 때도 새벽에 닭이 울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울음 소리가 들렸다. 2000년 전 베드로가 들었던 닭 울음도 이런 소리가 아니었을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쪽으로 걸어갔다. 창밖으로 예루살렘 성곽과 올리브 산이 빤히 보였다. 푸르스름한 여명을 뚫고 ‘꼬~끼~오!’하는 닭 울음이 연거푸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다소 의외였다. ‘이런 도심에서도 새벽에 닭이 울다니.’ 잠시 후에 깨달았다. 그 울음이 우리의 가슴을 ‘콕!콕!’ 쪼고 있음을 말이다. ‘신의 속성’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일상을 ‘콕!콕!’ 찌르고 있음을 말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결박해 빌라도 총독에게 끌고 갔다.
베드로 통곡 교회의 뜰에는 동상이 있다. 하녀들의 물음에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