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칼럼] 차동엽 신부와 여덟 가지 행복의 비밀
지난 12일 ‘가톨릭계 스타신부’인 차동엽 신부가 선종했습니다. 부고 기사에는 ‘향년 61세’라는 글자가 박혔습니다. 참 아까운 연세입니다. 차 신부는 ‘가톨릭 신앙에 바탕한 자기계발서’라는 평을 듣는 『무지개 원리』라는 책으로 밀리언셀러 작가가 됐습니다. “가톨릭 신자의 집이라면 『무지개 원리』가 한 권은 책꽂이에 꽂혀 있다”고 회자될 정도였습니다.
정작 종교담당 기자로서 제가 놀랐던 지점은 밀리언셀러 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라고 불리는 대목에 대해 질문을 던질 때마다 차 신부는 깊이 있는 영성적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부고 기사를 쓰면서 그동안 여러 번의 인터뷰를 통해 차 신부가 던졌던 ‘차동엽의 답변’을 찬찬히 훑어봤습니다. 시차를 떠나 지금도 종교적 울림이 뚝뚝 떨어지는 대목이 곳곳에 있더군요.
한번은 차동엽 신부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답변에는 깊은 묵상 끝에 길어 올리는 깨달음이 담겨 있습니다. 저술과 강연으로 바쁠 텐데 언제 묵상을 하십니까?” 차 신부의 답변은 뜻밖이었습니다. “신학생 때 나무 아래서, 벤치 위에서, 하릴없이 오며가며 골똘히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돌아보면 그게 묵상이었지요. 그때 저의 내면으로 던졌던 그 많은 물음이 지금 하는 저술과 강연의 1차적 밑거름입니다.”
간혹 점심식사를 함께 할 때면 작은 도시락을 따로 싸 왔습니다. 식당에서 저는 주문한 음식을 먹고, 차 신부는 야채와 몇몇 반찬, 그리고 적은 분량의 밥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놓고 먹었습니다. 그때 이미 간의 해독력이 많이 약해져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때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휴식과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간경화 환자였지만, 차 신부는 멈추지 않고 ‘가톨릭의 미래’를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설립한 연구소 명칭도 ‘미래사목연구소’였습니다.
차 신부는 서울이 고향입니다. 관악구의 달동네 난곡에서 자랐습니다. 비탈진 길과 다닥다닥 붙어 있던 판잣집들, 그 사이를 누비며 차 신부는 연탄과 쌀을 배달하면서 힘겨운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런 가난을 경험하면서 차 신부는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가톨릭 신학대에 들어갔습니다. ‘물질적 가난’보다 ‘영적인 가난’에 고인은 더 목이 말랐던 걸까요. 그런 가난을 통해서 길어 올렸기에 그의 두레박에는 ‘남다른 답변’이 담겼던 걸까요.
김포의 연구소에서, 서울의 명동성당에서 수차례에 걸쳐 차 신부와 나누었던 인터뷰의 문(問)과 답(答)을 다시 불러봅니다. 14일은 고인의 발인 일이었습니다. 고인의 마지막 길에 세상을 향해 던졌던 그의 영성과 육성이 가을비처럼 우리의 가슴을 적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차 신부는 생전에 “신약성서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름 아닌 ‘주님의기도(주기도문)’와 ‘산상수훈의 팔복’이었습니다. 차 신부와 인터뷰를 하면서 ‘주님의기도’문구를 옆에다 놓고서 조목조목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 ‘주님의 기도’에 얽힌 역사적 배경이 있나.
-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이 먼저 기도를 했다. 사람들은 주님의 기도가 ‘주님이 가르친 기도’라고만 기억한다. 본질은 그게 아니다. 주님이 직접 바치신 기도다. 그걸 먼저 알아야 한다.”
첫 구절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다. ‘하늘’의 의미는.
- “‘우주를 주재하시는 분이여’ ‘초월적인 분이시여’란 뜻이 담겨 있다.”
왜 ‘우리 아버지’라고 했나.
- “‘우리’라는 말을 보라. ‘우리 엄마’‘우리 아빠’‘우리 아들’할 때의 ‘우리’다. 굉장히 친밀한 관계라는 거다. ‘아버지’란 말도 그렇다. 예수님은 나자렛 지방의 방언인 아라메아어를 썼다. 거기선 ‘아바(Abba)’라고 부른다. 우리말로 ‘아빠’란 뜻이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우리 엄마’할 때의 뉘앙스로 ‘우리 아빠’라고 불렀던 거다.”
성경에는 왜 ‘아버지’라고 기록됐나.
- “성경은 그리스어로 기록됐다. 그런데 그리스어에는 ‘아바(아빠)’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란 뜻의 그리스어인 ‘파테르(Pater)’로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빠’라고 불렀다. 하느님을 거창한 이름으로 부르니까 거리를 두는 거다.”
둘째 구절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다. 아버지의 이름이 빛날 때는 언제인가.
- “나의 이름이 아버지의 이름을 가리지 않을 때다. 그럴 때 빛이 난다. 나도 마찬가지다. 본당에서 강연을 하고 박수를 받을 때가 있다. 그럼 꼭 돌아서서 십자가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내가 받는 박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매 순간 그걸 따져봐야 한다. 나의 이름이 아버지의 이름을 가리지 않는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라고 했다.‘아버지 나라가 오심’이란.
- “‘아버지 나라’는 하느님 나라다. 그건 나와 하느님의 ‘관계성’이다. 나와 하느님의 커뮤니케이션, 거기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거다. 바로 아버지 안에 내가 있는 거다. 동시에 내 안에 아버지가 있는 거다. 그렇게 서로에게 거하는 거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땅은 어디인가.
- “‘땅’은 인간이다. 우리의 내면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우리 안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
- ‘아버지의 뜻’을 막는 장애물은 없나.
- “있다. 최후의 장애물이 ‘나의 뜻’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가장 빠르고, 가장 확실한 지름길은 뭡니까?’하고 물을 거다. 그건 ‘산상수훈’속에 담겨 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했다. 빵만 양식인가.
- “육적인 양식은 빵이고, 영적인 양식은 ‘말씀’이다. 그런데 그 양식을 때때로 우리가 차단한다. ‘나의 뜻’이 ‘하느님의 뜻’을 가릴 때처럼 말이다.”
- 미사에서 ‘주님의 기도’를 올릴 때는‘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고 끝을 맺는다. 왜 ‘영원히’인가.
- “이 3차원 공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다. 그런데 3차원 공간을 넘어서면 공간이란 개념도, 시간이란 개념도 부질없는 곳이다. 그 세상에 ‘영원함’이 있다. 그러니 우리가 죽으면 ‘영원’속으로 들어가는 거다.”
어떤 사람은 “달라”고 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버리겠다”고 기도한다. 어떤 게 ‘기도’인가.
- “‘생계형 기도’가 있고, ‘이슬형 기도’가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들에겐 하루를 살아가는 게 거룩한 일이다. 그들에겐 밥이 하늘이다. 그들은 먹고 사는 생계 속에서 예수님의 구체적인 손길과 사랑을 느낀다.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그 사람들이 좀 더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이슬형 기도’로 옮겨갈 것이다. ‘이슬형 기도’는 관상이나 묵상 등 깊은 몰입에 들어가는 일치형 기도다.”
주님의 기도’는 왜 중요한가.
- “나와 하늘이 통해야 한다. 그런데 두꺼운 장막이 처져 있다. 그게 하늘장막이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는 그 장막을 뚫게 한다. 그리고 하늘과 땅을 잇게 한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이 ‘너희가 나에게 도달하고 싶으냐. 그럼 요렇게 해봐라’하고 ‘노하우’를 일러주신 거다.”
끝으로 ‘주님의 기도’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 “‘주님의 기도’는 ‘주님을 만나기 위한 길’이다.”
2008년 12월 이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참이었습니다. 차 신부는 “내년 이맘 때쯤에는 신약성서의 두 번째 기둥인 ‘산상수훈의 팔복’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자”고 했습니다. 꼬박 1년을 기다렸습니다. 철새 떼가 줄지어 김포의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던 2009년 12월에 다시 그와 마주 앉았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의 팔복’에 대해 물었습니다.
“왜 산상수훈의 팔복인가”라는 물음에 그는 “쇼트컷(지름길)이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무엇을 향한 쇼트컷일까. 차 신부는 “현대인의 소망은 하나다. 행복해지는 거다. 그런데 방법을 모른다. 대체 어떡해야 행복해질까. 그 비밀이 팔복에 있다”고 말하다군요. 예수가 갈릴리 호숫가의 언덕에서 설했던 여덟 가지 행복의 비밀, 그걸 차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을 명쾌하게 파악하는 사람이 드물다. 왜 그런가.
- “예수님은 유대인이었다. 히브리어를 썼다. 더 정확히 말하면 히브리어 사투리인 아람어를 썼다. 제자에게, 과부에게, 고아에게, 병자에게 예수님은 아람어로 말했다. 그런데 예수님 사후, 성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됐다. 유대 문화와 그리스 문화, 그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 이 간격을 회복하지 않으면 ‘팔복’의 정확한 의미를 간파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리스어 성서는 다시 라틴어로, 다시 독일어로, 다시 영어로, 다시 한국어로 바뀌었다. 그 와중에 또다시 간격이 생겼다.”
그 간격을 어떻게 넘을 건가.
- “저는 자연과학도(서울대 공대) 출신이다. 저의 접근법은 연역이 아니라 귀납이다. 2000년 전, 갈릴리 호숫가에서 군중에게 설했던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척하면 삼천리’였다. 그만큼 알아듣기 쉬운 말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영어권 기자가 왔다고 치자. 그 기자는 ‘척하면 삼천리’식의 표현부터 막힐 거다. 왜 삼천리인가. 그건 한국 문화를 알아야 이해되는 표현이다. 산상수훈의 팔복에도 그런 코드가 있다. 열쇠는 결국 ‘언어’다. 히브리어에 대한 언어사적인 추적, 그걸 통해 간격을 뛰어넘으려 한다.”
- ‘주 기도문’과 ‘산상수훈’은 신약성서의 두 기둥이다. 각각 어떤 의미인가.
- “주 기도문은 수직선이다.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말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성 교본’이다. 산상수훈의 팔복은 수평선이다. 우리에게 수평적인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한 마디로 ‘실존 교본이자 생활 교본’이다.”
이 ‘생활 교본’의 종점은 어디인가.
- “행복이다. 팔복은 모두 ‘행복하여라, ~한 사람들!’로 시작한다. 현대인은 다들 고민한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예수님께선 거기에 대한 답을 던지셨다. 삶의 목표를 ‘행복’으로 정한 거다.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8가지 길을 제시한 거다.”
- 그 길이 추상적이지 않나.
- “아니다. 팔복은 관념적인 길이 아니다. 매우 구체적인 길이다. 그래서 ‘팔복’은 아름다운 시(詩)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강령이다. 굳이 시라고 하자면 현자(賢者)의 시에 해당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헛다리 짚지 않게, 시간을 허송하지 않게, 거짓에 속지 않게 도와준다. 그래서 팔복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 ‘팔복’은 그리스도인만을 위한 건가.
- “그렇지 않다. 팔복은 그리스도인만을 위한 처방전이 아니다. 팔복은 예수라는 ‘꼰대’가 그리스도인을 위해서만 가르쳐준 고리타분한 행복 처방이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라도 이 ‘처방전’에 담긴 통찰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 지금껏 누렸던 행복의 차원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행복하여라. 어떤 행복인가.
- “‘행복(Happiness)’의 어원은 ‘Happen(일어나다ㆍ발생하다)’이다. 행복은 발생하는 것이다.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누가 발생시키느냐. 바로 나 자신이다. 이건 행복에 대한 원리이자 법칙이다. 테크닉이 아니다. 예수님께선 그렇게 행복을 발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마음을 알려주신 거다.”
대체 ‘마음이 가난한’게 뭔가.
- “먼저 예수님께서 사용했던 히브리어를 보자. ‘가난’은 ‘에비온(ebiyon)’이다. 이 말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가난’을 뜻한다. 성서에선 고아들, 과부들, 나그네들에게 이 말이 종종 쓰였다. 요즘 말로 하면 갈 데도 없고, 기댈 데도 없는 노숙자쯤 된다. 그런 절대적 가난을 가리킨다.”
그럼 ‘물질적 가난’을 뜻하나.
- “아니다. 그렇게 의미가 얕지 않다. 이건 ‘영성적인 가난’을 뜻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도 ‘마인드(Mind)’가 아니라 ‘영(Spirit)’이란 의미다. 구약 시편의 영성가들은 ‘저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저를 돌봐주세요. 주님의 도움 없이 저는 살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영적인 가난은 그런 가난이다.”
‘영적인 가난’을 한마디로 풀어달라.
- “하늘의 은혜, 자연의 은혜에 맡기면서 살려는 자세다. 내가 인공적으로 나의 안전을 구하지 않고, 하늘과 자연에 맡기고 의지하면서 살려는 태도다.”
‘영적인 가난’이 왜 중요한가.
- “사람들은 다들 ‘내 삶의 안전장치’를 마련한다. 돈을 통해, 직장을 통해, 가족을 통해, 명예를 통해 그걸 구축한다. 그리고 안전장치가 버텨주길 바란다. 그런데 이런 장치는 결국 무너지게 마련이다. 궁극적 안전장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가난’의 바탕에는 무너지지 않는 안전장치가 있다.”
구체적인 일상에선 어떻게 써먹나.
- “이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누리려고 하는 거다. 내게 주어진, 이미 주어진 이 하늘의 은혜, 자연의 은혜를 누리는 거다. 그게 영적으로 가난한 거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 되나.
- “그렇다. 우물 안 개구리와 우물 밖 개구리가 있다. 그들이 보는 하늘은 다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집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보고 행복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우물 밖 개구리는 하늘에 달린 별을 보고 행복해한다. 우물 밖 하늘을 보면 다시 우물 속으로 들어가도 개구리의 삶은 달라진다. 여유 있고, 지혜롭고, 넉넉하고, 자∼알 살 수 있게 된다.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 슬퍼하는 사람들. 어떤 슬픔인가.
- “마태오 복음에선 ‘펜툰테스(Penthoun-tes)’라고 썼다. 이건 상실의 슬픔이다. 사별 등 매우 소중한 걸 잃은 극심한 슬픔을 뜻한다. 루카 복음에선 ‘클라이온테스(Klaiontes)’란 말을 썼다. 그건 땅을 치면서 우는 걸 뜻한다.”
예수는 무슨 단어를 썼나.
- “히브리어로는 ‘사파드(Sapad)’다. 애통해하면서 우는 걸 뜻한다. 예수님은 이 말을 썼을 것이다. 슬픔은 감정이고, 우는 건 표출이다. 사파드에는 이 두 의미가 통합돼 있다.”
- “맞다. 사람들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도대체 슬퍼하는 사람이 왜 행복할까. 그 답이 ‘위로’에 있다. 유대인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성서를 기록할 때 수동태를 많이 썼다. ‘하느님’이란 주어를 생략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 구절의 ‘위로’는 ‘하느님이 주시는 위로’가 된다.”
슬프다고 다 위로를 받는 건 아니지 않나.
- “이런 말이 있다. ‘슬픔은 비와 같다. 장미꽃을 피울 수도 있고, 진흙탕을 만들 수도 있다.’ 결국 슬픔도 선택의 문제다. 헤리 로더라는 가수가 있었다. 그는 공연 중에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도 평소처럼 노래하며 공연을 마쳤다. 그리고 야전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아들의 시신을 붙들고 우는 대신, 그곳에 있던 군인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훗날 잡지사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의 죽음이 너무도 슬펐다. 그러나 하느님께 제 슬픔을 맡겼다. 그러자 놀라운 위로와 힘을 받았다. 나는 그걸 보여줬을 뿐이다.”
- 우리의 일상에 극심한 슬픔이 닥칠 때는 어찌해야 하나.
- “슬픔과 절망을 겪지 않은 사람의 삶은 싱겁다. 그래서 누리는 행복도 싱겁다. 우리가 명심할 건 슬픔의 끝에 위로가 있다는 거다. 슬픔의 크기와 비례하는 위로가 말이다. 그걸 가슴 깊이 받아들이면 희망이 생겨난다. 고통이 와도, 슬픔이 와도 두렵지만은 않게 된다. 그 고통의 끝에 무엇이 있는 줄 아니까.”
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 온유’의 히브리어는?
- “‘아나브(Anab)’다. 온유함, 겸손함의 뜻을 담고 있다.”
‘온유함’의 정확한 의미가 뭔가.
- “온유한가, 아닌가. 그건 식당에 가보면 안다. ‘뭘 드실래요?’ 할 때 ‘아무거나’하는 건 우유부단한 거다. 온유한 사람은 ‘오늘은 네가 시키는 걸 먹어볼게’라고 한다. 나의 자유의지를 양보하고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는 거다. 가장 성숙한 사랑이 뭔가. 그건 상대방에게 자유의지를 주는 거다.”
종교적으로 볼 때는 어떤가.
- “어마어마한 뜻이 된다. 여덟 가지 복 중 하나를 고르라면 저는 ‘온유’를 고르겠다. 거기에는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는 고백(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올렸던 기도)이 녹아있다. 항상 내 뜻은 생각이 짧다. 그러나 당신 뜻이 이뤄지면 다르다. 거기에는 큰 지혜와 큰 능력이 흐른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에게 무한 지혜와 무한 능력이 흘러드는 거다. ”
생활 속의 예를 들어달라.
- “인생을 바둑이라고 치자. 우리의 바둑은 18급이다. 하느님의 바둑은 100단이다. 18급은 100단의 훈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열고 100단의 훈수를 따른다. 그러나 고집이 센 사람은 어떤 훈수가 와도 자기 바둑을 고집한다. 그는 결국 18급 바둑, 18급 인생에 머물게 된다.”
4.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의로움. 무슨 뜻인가.
- “히브리어로는 ‘체다카(Tzedakah)’다. ‘어떤 기준에 부합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 모호하다. 기독교에서 그 기준은 뭔가.
- “시대마다 달랐다. 아브라함에겐 ‘네 양심에 충실했느냐’였다. 모세 때는 ‘십계명’이었다. 십계명을 잘 지켰는지가 의로운가, 아닌가의 기준이었다. 십계명의 알맹이는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나중에는 그게 쏙 빠져버렸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선 십계명의 껍데기로만 기준을 재는 율법주의가 판을 쳤다. 그걸 예수님께서 뒤집었다.”
어떻게 뒤집었나.
- “‘사랑’으로 뒤집었다. 그건 격식을 파괴하는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예수님은 의로움의 잣대로 ‘사랑’을 명시했다.”
사랑이 깔린 의로움. 그럼 뭐가 달라지나.
- “격이 달라진다. 격이 낮은 의로움은 날카롭고 차갑다. 그건 상대방을 비판하고 단죄한다. 그러나 격이 높은 의로움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상대방을 안아서 녹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허공에다 정의를 외치고, 후자는 눈물로 사랑을 산다.”
오늘날 얘기로 풀어달라.
- “안중근 의사를 보라. 그는 독립운동 근거지가 탄로 날 우려가 있음에도 일본군 포로를 풀어준 적이 있다. 그리고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 악한 것을 물리친다’고 말했다. 그에겐 하나의 생명도 아끼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던 거다. 안 의사는 그 마음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다.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사랑의 주춧돌 위에 선 정의, 그게 진정한 의로움이다.”
거창하다. 의로움은 투사의 덕목인가.
- “아니다. 의로움(정의)은 투사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니다. 이름 없는 소시민도 삶의 뒤안길에서 주워 올릴 수 있는 참 행복의 비밀이기도 하다.”
5.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 ‘자비’가 뭔가.
- “히브리어로 ‘케세드(Chesed)’다. 이건 굉장히 풍요롭고 심오한 단어다. ‘케세드’는 동정이나 측은지심 등 공감 능력을 뜻한다.”
쉽게 설명해 달라.
- “암 선고를 받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갈수록 성격이 난폭해졌다. 가족은 물론 병원의 전문 상담가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아는 동네 꼬마가 병문안을 왔다. 병실에 들어간 꼬마는 30분 뒤에 나왔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랬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할아버지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들과 편안하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가족이 꼬마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니?’ 꼬마가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할아버지께서 우시기에 따라서 같이 울었을 뿐이에요.’ 그게 바로 아이가 건넨 자비였다.”
그게 왜 자비가 되나.
- “상대방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됐으니까. 그렇게 상대와 내가 통했으니까. 예수님이 일생을 통해서 구원 활동을 했던 동기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자비심 때문이다.”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왜 자비를 입게 되나.
“따져 보라. 자비는 남는 장사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면 하늘에서 더 큰 자비가 쏟아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처럼 자비는 선한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자비가 영적으로 발휘되면 죄에 대한 용서가 되고, 물질적으로 발휘되면 자선이 된다.”
생활 속에선 어떻게 적용하나.
- “‘남을 심판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딱 이 세 마디를 실행하는 거다. 어려운가? 그렇지 않다.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할 때 학장 신부님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학교에 몸담고 있어 자선을 베풀 기회가 별로 없다. 그래서 운전을 할 때라도 자선을 하자는 생각으로 계속 양보 운전을 한다.’ 생활 속 자선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 ‘마음이 가난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그 말이 그 말 같다. 깨끗함이 뭔가.
- “그리스어로는 ‘카타로스(Katharos)’다. 잡티가 없는 순수함을 뜻한다. 그런데 이 말은 ‘카타르시스(katharsis)’의 어원과 같다.”
어원이 같다는 건.
- “카타르시스는 씻겨냄 뒤에 오는 거다. ‘카타로스’도 마찬가지다. 눈물로 씻어내고, 회개로 씻어내는 거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보며 씻어낸다. 예수의 삶을 묵상하며 자신을 씻는다. 그렇게 씻어낸 뒤에야 마음이 깨끗해지는 거다.”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현대인은 정신없이 바쁘다. ‘씻어냄의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다.
- “이탈리아의 영성가 카를로 카레토가 이 물음에 답을 던진 바 있다. ‘당신이 만약 사막에 갈 수 없다면 당신의 생활 가운데 사막을 만들어야 한다. 거기서 침묵과 기도를 하라. 그렇게 영혼을 재건하기 위한 고독을 찾아야 한다. 그게 바로 영성 생활이다.’”
-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고 했다. 정말 보는 건가.
- “그건 3차원적인 언어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꿈에서 하느님을 봤다’‘환시를 통해 하느님을 봤다.’ 그런데 그건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낮은 수준이고, 가장 위험한 수준이다. 형상이 없는 하느님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통함’의 의미가 된다.”
통한다는 게 뭔가.
- “예수님은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서로에게 거할 때 통하는 거다. 그때 안테나의 주파수가 맞는 거다. 마음이 깨끗할수록 안테나의 감도도 좋아진다. 그래서 나의 마음이 잡음 없이 하느님의 마음을 수신하는 거다. 그게 통함이다.”
7.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 평화가 뭔가.
- “그리스어로 ‘에이레네(Eirene)’,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이다. 죄나 허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나는 요즘 평화롭다고, 문제가 없다고.
- “그건 주로 세상이 주는 평화다.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박해가 없을 때, 냉장고가 가득 찼을 때, 생활에 골칫거리가 없을 때 평화롭다고 느낀다. 그런데 예수님의 평화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 “박해를 받을 때도 평화롭고, 냉장고가 비었을 때도 평화롭고, 생활에 문제가 있을 때도 평화롭다. 예수님은 그런 평화를 말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때 쓰인 ‘안식’이 그리스어로 ‘에이레네(평화)’, 히브리어로 ‘샬롬’이다. 참 평화는 풍랑 속에서, 전쟁터에서, 역경의 한복판에서도 누리는 평화다.”
어떡해야 그런 평화를 누릴 수 있나.
- “먼저 나 자신과 화해해야 한다. 내 안의 상처, 내 안의 허물을 수용해야 한다. 그리고 말하는 거다. ‘사랑해! 그래도 괜찮아.’ 그렇게 수용하고 사랑하면 화해가 이뤄진다. 그다음에는 사람과, 또 자연과 평화를 이루는 거다.”
8.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많은 사람이 여기서 ‘순교’를 떠올리지 싶다.
- “이 구절은 팔복의 절정에 해당한다. 여기서 핵심은 순교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의 에너지가 없는 사람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가 없다.”
박해를 받는데 왜 행복한가.
- “그건 역설적인 행복의 비밀이다. 박해 받음의 상징은 십자가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유대인은 ‘돌팔이 메시아’라고 했고, 그리스인은 ‘어리석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은 십자가에서 약함이 아니라 강함을 봤다.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봤다. ”
- “몰아(沒我)적인 사랑에서 뿜어져 나온, 죽음도 이기는 힘이다. 결국 시련과 고통, 박해를 이기는 건 사랑의 힘이다.”
- 하늘나라가 왜 그들의 것이 되나.
- “믿음과 소망, 사랑이 있다. 그 중에 왜 사랑이 제일인가. 믿음과 소망은 완성된 후에 사라진다. 그러나 사랑은 다르다. 완성된 후에도 지속된다. 영원히 지속된다. 결국 셋 중 사랑만 남는다. 사랑은 하늘나라의 속성이다.”
인터뷰 말미에 차 신부는 성서 속 일화를 하나 꺼냈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가서 추수를 하라’고 말했다. 한 아들은 ‘네!’ 대답만 하고 추수를 하지 않았다. 다른 아들은 대답 없이 가서 추수를 했다.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행했느냐?’”
예수의 물음은 지금도 계속된다고 했다. “‘너, 나를 믿느냐? 너, 나를 따르느냐?’ 우리는 이 물음에 ‘아멘!’하고 입술로만 대답한다. 그래서 ‘이름만 그리스도인,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되고 만다. 예수님께서 기다리시는 건 입술을 통한 대답이 아니라 삶을 통한 대답이다. 그 구체적인 대답의 지침서가 바로 산상수훈의 팔복이다.”
이제는 아무리 인터뷰 요청을 해도 답이 없으시겠네요. 사랑뿐인 하늘나라에서 차동엽 신부님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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