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기타)/Health(건강)

장내 미생물은 저 멀리 뇌에도 영향 미친다

2019. 4. 7. 10:22

장내 미생물은 저 멀리 뇌에도 영향 미친다

 

[토요판] 천종식의 미생물 오디세이
⑩ 뇌질환과 장내 미생물
장과 뇌에 연결 축이 있다?
10년 전엔 가설 수준이었지만
최근 자폐, 파킨슨병, 조현병 등
뇌질환과 미생물 연관성 규명

장내 미생물이 면역세포 조절하고
그 결과로 뇌질환에 영향 끼쳐
아직은 주로 동물실험 결과지만
인간 뇌질환 치료 가능성 기대
자폐, 파킨슨병, 조현병 같은 뇌질환들이 뇌에서 멀리 떨어진 대장 안의 미생물 생태계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최근 10년 새 잇따르고 있다. 장내 미생물 생태계를 조절하면 뇌질환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기대도 생겨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자폐, 파킨슨병, 조현병 같은 뇌질환들이 뇌에서 멀리 떨어진 대장 안의 미생물 생태계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최근 10년 새 잇따르고 있다. 장내 미생물 생태계를 조절하면 뇌질환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기대도 생겨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사회의 약자를 대변하던 민변 출신 변호사 순호(정우성 분)는 잘나가는 대형 법률회사로 이직해 살인사건 용의자의 변호를 맡는다. 막대한 재산가인 집주인을 질식시켜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 자살을 시도한 집주인을 오히려 막으려고 했다는 가정부의 말과 명백한 살인이었다는 검사의 주장 사이에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은 이를 목격한 중학생 소녀, 지우(김향기 분)뿐이었다. 지우는 공교롭게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사회와 자신을 격리하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줄여 ‘자폐’)를 갖고 있다. 과연 순호는 지우의 세상과 소통하여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 올해 개봉한 영화 <증인>은 자폐를 중심으로 흥미진진하게 살인 사건을 풀어간다. 이병헌, 박정민이 열연한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도 자폐를 가진 동생이 형과 같이 살게 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다룬다. 두 영화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자폐인이 지닌 소통의 어려움과 그들이 가진 특별한 재능에 관한 것이다.

보통 자폐라고 칭하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스펙트럼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이 한가지 증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두 영화의 경우처럼 암기나 음악 등에 특별한 능력을 보이는 서번트 증후군도 있지만, 이는 일부이고 명문 대학에 입학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부터 성인이 된 뒤에도 말로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자폐인의 증상은 천차만별이다. 중증의 경우 질병으로 인해 직접 고통받는 환자도 문제지만 거의 모든 뇌질환이 그렇듯이 이들을 돌보는 가족과 사회에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자폐아, 장내 미생물 다양성 떨어져

지난해 발표된 미국 질병관리센터의 통계에 따르면, 아이 59명 중 1명이 자폐를 앓고 있다고 한다. 2000년 조사에서는 150명당 1명꼴이었으니 최근 18년간 2배 넘게 늘어난 수치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정확한 최신 통계가 없지만 비슷한 경향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엄청난 수도 문제지만 최근에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에도 주목해야 한다. 필자는 지난 연재에서 최근 항생제 남용이나 정제된 가공 음식 위주의 서구화된 식단으로 장내 미생물 생태계에 불균형이 생기고, 그 결과 비만, 당뇨, 아토피, 장질환, 암 등 다양한 질병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많은 연구결과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과연 자폐 같은 뇌질환도 장내 미생물의 불균형으로 인해 급격히 증가한 것은 아닐까?

10년 전 미국 메릴랜드대로 파견되어 연구원 생활을 하던 필자는 장내 미생물 생태계, 즉 마이크로바이옴 분야의 연구자들을 두루 만날 기회가 있었다. 1천억원 이상의 연구비가 투입된 미국의 ‘인간 마이크로바이옴 프로젝트’가 막 시작된 때이기도 했다. 당시 학회에서 만난 몇몇 연구자는 자폐와 장내 미생물이 분명히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주장했다. 평생 미생물을 연구했지만, 장에 사는 세균이 도대체 어떻게 몸의 반대쪽에 있는 뇌에서 그런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차마 앞에서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참 상상력도 지나치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실 구체적으로 미생물과의 연관성을 연구한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뇌질환이 장 또는 장내 미생물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측할 만한 증거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자폐, 파킨슨병, 치매 환자의 절반 이상은 변비나 설사와 같은 고질적인 장질환을 앓고 있다는 점이다. 추가로 이런 장질환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세균을 선택적으로 죽이는 항생제를 사용하면 이런 뇌질환이 일시적으로나마 좋아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두루뭉술했던 장과 뇌의 연결점은 장내 미생물 생태계를 정확히 분석할 수 있는 유전자 해독 기술이 도입된 지난 10년간 집중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장내 미생물과 질병의 관계를 보는 시작점은 미생물이 전혀 없는 무균 환경에서 자란 동물을 관찰하는 것이다. 사람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가장 많이 연구에 사용하는 생쥐도 사회생활을 하므로 자폐나 조현병 같은 다양한 뇌질환의 연구에 활용할 수 있다. 무균 상태로 태어나 자란 생쥐의 사회성을 관찰한 아일랜드 코크대 연구팀은 장내 미생물이 없을 때 생쥐의 사회성이 감소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사람의 경우 자폐아와 정상아 사이에 장내 미생물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3살에서 16살에 이르는 미국 태생 자폐아를 조사해본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연구팀은 이들의 장내 미생물 생태계의 종 다양성이 정상아보다 떨어지고 프레보텔라와 같은 세균이 적게 발견되었다고 보고했다. 이 세균은 이전 글(2018년 12월15일치 ②장내 미생물과 비만)에서도 다룬 적이 있다. 바로 미국 이민자의 장에서 식생활 서구화로 인해 줄어든 바로 그 세균이다.

미생물 생태계 바꿔 자폐 증상 완화

장내 미생물과 뇌질환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의 전체가 완전히 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바로 우리 면역계이다. 미생물이 장에 있는 면역세포를 조절하고 그 결과로 뇌에 이상이 생긴다는 가설이다. 세계의 수많은 연구자가 경쟁하는 가운데 최근에 이 가설을 증명할 결정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한 연구자는 한국인 면역학자 허준렬 하버드대 교수다. 허 교수는 임신한 생쥐가 특정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자식에게 자폐 증상이 나타나는 현상을 이용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어미 생쥐에게는 염증을 일으키는 ‘티에이치17’(Th17)이라는 면역세포가 만들어지고 이로 인해 새끼의 뇌에 자폐 증상이 나타나는 변화가 생긴다. 이 실험 모델을 이용해서 허 교수 팀은 질병을 일으키는 또 다른 중요한 방아쇠를 발견했다. 바로 장내 세균이다.

연구팀이 찾은 용의자는 절편섬유상세균(SFB)으로 불리는 종인데, 이전까지 거의 알려진 적이 없어 학명조차 없는 미지의 미생물이다. 만약에 이 세균이 장에서 염증을 일으키는 티에이치17 면역세포의 수를 늘리는 역할을 한다면, 반대로 이 세균을 없애면 새끼에게 자폐 발생이 줄어들까? 연구팀이 반코마이신이라는 항생제를 어미 쥐에게 먹여 절편섬유상세균을 장에서 제거하자 실제로 새끼에게서 자폐 증상이 사라지는 것이 확인됐다.

그런데 아쉽게도 필자가 진행 중인 한국인 시민과학프로젝트와 다른 나라의 조사결과를 보면 이 세균은 사람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에게도 이런 역할을 하는 세균이 있을까? 아니면 하나의 세균이 아닌 수백종이 모인 생태계가 자폐를 일으키는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일까? 당연히 허준렬 교수와 필자 같은 이 분야의 연구자들이 연구계획서의 가장 상단에 올려놓고 있는 과제이다.

동물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수행된 임상연구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가장 긍정적인 연구는 애리조나주립대 연구팀이 2017년에 발표한 대변 미생물 이식에 대한 임상시험 결과다. 연구책임자인 로자 크라지말닉브라운 교수와 실제 연구를 주로 수행한 강대욱 박사는 불균형인 자폐아의 장내 미생물 생태계를 정상으로 복원하여 그 결과를 관찰할 목적으로 이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팀은 6~17살의 자폐 환자 18명을 모집하여 이들을 대상으로 마이크로바이옴 이식을 시행했다. 건강한 사람의 대변에서 모은 이식용 미생물 군집은 환자에게 주입하기 전에 철저하게 병원균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확실한 생태계 복원을 위해 연구진은 18주에 걸쳐 여섯차례의 장내 미생물 이식을 반복해서 수행했다. 이식 뒤 환자의 장은 원래 있었던 미생물은 대부분 사라지고, 대신 이식한 미생물로 바뀌어 있음을 미생물 유전자 검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정상인 수준의 종 다양성을 갖춘 균형 잡힌 생태계가 복원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환자들의 증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폐 환자에게 있던 고질적인 변비, 설사, 복통 등의 장질환은 18명 중 16명에게서 80% 이상 크게 개선되었다. 물론 더 관심이 쏠린 부분은 자폐 증상의 완화 여부이다. 환자의 부모와 의사에 의해 각각 측정된 다양한 자폐 관련 증상을 취합 분석한 결과, 평균 25% 정도 자폐 증상의 호전이 나타났다. 이 연구는 극히 적은 환자에 대해서 이루어졌으며 일반적인 임상연구에 필수인 위약군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런 한계에도 실험동물을 대상으로 수행된 많은 연구에서 나타난 장내 미생물과 자폐의 인과관계 그리고 이를 이용한 치료 가능성을 확인해주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대변 미생물 이식 임상시험이 끝난 2년 뒤까지도 특별한 추가 조처 없이 당시 참가했던 자폐아 18명의 증상이 다시 악화하지 않고 장내 미생물 생태계의 균형도 잘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연관성 확인, 치료방법 찾기는 과제

노령화와 함께 늘어나고 있는 파킨슨병도 마이크로바이옴과 연관성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는 질병 가운데 하나다. 영화 <백 투 더 퓨처> 시리즈의 주인공 마이클 제이 폭스가 앓아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 뇌질환은 느린 운동, 정지 시 떨림, 근육 강직 등이 나타나는 퇴행성 질환으로 역시 완치할 치료제가 없다. 이 병을 앓는 환자의 뇌에서는 알파시뉴클레인라는 단백질의 비정상적인 덩어리가 많이 관찰된다. 같은 단백질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만들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쥐는 실제로 파킨슨병 환자와 유사한 증상을 나타낸다.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칼텍)의 사르키스 마즈마니안 교수 팀은 파킨슨병을 앓는 모델 쥐를 이용해서 파킨슨병과 장내 미생물의 연관성을 관찰했다. 먼저 연구팀은 무균 상태의 쥐와 장내 미생물을 가진 쥐를 비교했는데, 무균 쥐보다는 미생물을 가진 쥐의 뇌에서 더 많은 알파시뉴클레인 덩어리가 관찰되고 더 심한 파킨슨병 증상이 나타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쥐의 대장 안 미지의 미생물들이 이 병의 발생에 관여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쥐와 사람의 장내 미생물은 상당히 다르다. 사람의 장내 미생물도 비슷한 역할을 할까? 연구팀은 파킨슨병 환자와 정상인의 대변을 각각 무균 생쥐에게 이식해봤다. 두 쥐 가운데 환자의 대변을 이식받은 쥐가 상대적으로 심한 파킨슨병 증상을 보였다. 파킨슨병을 앓는 사람의 장내 미생물이 쥐로 이식되면 그 병이 역시 악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해 중국 충칭시에서 수행된 연구에서는 비슷한 결과를 조현병에 대해서 얻기도 했다. 자폐와 파킨슨병에 이어서 조현병도 장내 미생물과의 관련성이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는 듯하다.

최근 과학과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인간의 뇌는 여전히 우리에게는 미지의 개척지다. 1천만년 이상 지속해온 미생물과 인간의 공생은 단순한 영양분의 공유에서 뇌에 대한 영향력까지 그 연구의 전선이 넓어지고 있다. 지난 수십년 동안의 엄청난 노력에도 오늘 언급한 뇌질환에 대한 마땅한 치료제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이제 막 우리가 탐험을 시작한 장내 미생물과 이들 질병의 접경 지역에서 새로운 치료방법이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다. 10년 전과는 달리 필자도 이젠 미생물과 뇌의 관계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필자가 서울아산병원 김효원 교수 연구팀과 한국인 자폐와 장내 미생물의 연관관계 규명을 위한 임상연구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출처 :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