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이해인
밤은 항상
뜨거운 불가마에 나를 구워 내는 도공(陶工)입니다
벗이여
칡뿌리같이 싸아한 향기를 거느린 밤 나는
깨어 사는 시인들을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 후둑후둑 비 맞고 섰는
빌린 목숨을 지켜보다
끝내는 신(神) 앞에 무릎 꿇었다는
당신의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지금은 고요히 창을 닫는 시간
허공을 뚫고 가는 기인 기적 소리에
흔들리는 향수(鄕愁) 같은 것
떠나는 자들의 고독을 한몸에 휘감은
기차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벗이여
우리에게 마침내 가야 할 집이 있음은
얼마나한 위로입니까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는 살아 가면서 절망을 거듭하지만
절망하는 만큼의 희망을 앎은
얼마나한 축복입니까
내 영혼이 시의 우물을 파는
밤에는 아무도 말을 건네지 않습니다
밤에는 가장 겸허한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벗이여
그리하여 이 밤엔 나도 도공(陶工)이 되어
펄펄 끓는 한 줄의 시를
사랑의 불가마에 구워 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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