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이진우씨는 지난해 비자금통장을 만들었다. 결혼 후 부인에게 공인인증서를 포함한 모든 경제권이 넘어가면서 여윳돈 만들기가 쉽지 않아서다. 이씨는 회사 휴일근무·야근 수당을 아내 몰래 이 통장에 넣어 비자금을 만들고 있다. 이씨는 “이렇게 모은 돈으로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거나, 갖고 싶은 물건을 사는 데 쓴다”고 말했다.
비자금통장은 지난 2007년 보이스피싱과 파밍(정상적인 홈페이지 주소로 접속해도 가짜 사이트로 유도돼 개인 금융 정보 등을 몰래 빼가는 수법)과 같은 전자금융사기를 예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은행 홈페이지나 모바일뱅킹 애플리케이션(앱)에서 계좌 조회가 되지 않고, 본인 계좌여도 본인이 직접 은행 창구에 방문해야 금전 거래도 가능해 고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그러나 비자금 관리에 용이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가입이 늘기 시작했다. 비자금통장은 부인이 남편의 공인인증서를 가지고 있거나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계좌 추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통장은 적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아 존재를 알 수 없는 전투기 ‘스텔스기’와 비슷하다고 해서 스텔스통장이라고도 불린다.
민병두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받은 ‘전자금융거래제한 계좌 현황’ 자료에 따르면 16개 은행(인터넷전문은행과 수신 기능이 없는 수출입은행 제외)의 비자금통장 계좌는 지난해 6월 기준으로 28만2030개로 집계됐다. 지난해 말 은행이 발급한 총 계좌 2억5937만개(개인 기준)의 0.1%에 해당하는 숫자다. 28만여개 계좌 가운데 남성 계좌(15만3629개)가 여성 계좌(12만8401개)보다 많았다.
가입 방법은 간단하다. 비자금통장 서비스가 가능한 은행에 가서 통장을 개설하면 된다. 통장 개설은 일반 통장 만드는 절차와 동일하고, 통장 만든 후에 보안계좌 서비스를 신청하면 된다. 신한·우리은행과 농협에서는 ‘보안계좌’, KB국민은행에서는 ‘전자금융거래제한 계좌’, KEB하나은행에서는 ‘세이프 어카운트’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서비스는 입·출금 통장은 물론 예·적금 통장도 가능하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주요 고객은 기혼자지만 최근에는 결혼 전 개인자산으로 묶어두기 위해 계좌를 개설하는 미혼들도 꽤 있다”며 “이 통장이 비자금으로 사용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연말보너스나 성과급이 나오는 12월이나 이듬해 1월 사이 계좌 개설 문의가 늘어난다”고 말했다.
비자금통장은 인터넷은행에서는 만들 수 없다. 이 통장은 오로지 지점 거래만을 통해 이용하도록 한 통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프라인 지점이 없는 카카오뱅크나 케이(K)뱅크에서는 이런 서비스가 불가능하다. 다만 케이뱅크에는 ‘계좌숨기기’ 서비스 기능이 있다. 케이뱅크 홈페이지 또는 모바일뱅킹 앱에서 특정 계좌가 노출되지 않도록 숨기는 서비스다. 그러나 본인이 원하면 숨긴 계좌를 다시 드러나게 할 수 있어 완벽한 비자금통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입 전에 알아둬야 할 점도 있다. 탈세나 돈세탁 등을 노린 진짜 ‘검은 비자금’을 맡기려는 생각은 접어두는 것이 좋다. 계좌 조회는 되지 않지만 세금 문제 등으로 금융당국에 계좌가 보고되기 때문이다.